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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tching Ghibli-그리고 제국주의는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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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또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모든 문화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제국주의와 국가주의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 내려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편협한 생각이다. 특히 일본 만화의 경우, 다른 나라의 만화와 폭력성이나 현란함 면에서 큰 차이가 없는 작품조차도 지나친 폭력성을 띠고 있거나 제국주의를 퍼뜨린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부당한 비판을 받는 작품은 상당히 있지만 시간과 지면, 인내심 문제로 모두 실을 수는 없고, 이 글에서는 모노노케 히메를 다루고 왜 이 작품은 제국주의 경향의 작품이 아니며 왜 그런 비판에는 문제가 있는지 밝히겠다.
이 작품이 일본 전설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며, 일본 전설이 일제 침략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모노노케 히메에서 차용한 일본 전설은 일제에서 악용한 전설과는 성격이 다르다. 일제는 일본의 건국 신화를 악용해 제국주의적 침략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이런 건국 신화는 주로 고대 국가의 왕권 강화를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이므로, 당연히 국가주의적 상징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을 어느 정도 담고 있다. 그러나 모노노케 히메에서 차용한 이야기는 국가주의적 상징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고, 지역에 따라 성격이 약간씩 다를 뿐인 도깨비/요정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론 '일본의 도깨비 이야기'이기 때문에 일본이라는 국가의 특색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이 이유로 이 작품이 제국주의적 성격을 띤다고 비판하는 것은 히틀러가 북유럽 신화를 악용했다고 해서 북유럽 신화의 전혀 다른 부분을 소재로 한 '호빗'이나 '어둠은 일어나고 있다' 같은 동화를 제국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그런 비판을 한 사람의 논리를 따른다면, 모든 나라의 건국 신화는 제국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상징을 널리 퍼뜨리므로 언급하는 것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 그만큼, '전설'이라는 것만을 이유로 바로 제국주의를 떠올리는 것은 편협한 발상이다.
또한,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은 약자에 대한 폭력이나 인간 외의 다른 대상, 즉 자연에 대한 폭력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사회적 약자인 '팔려 간 여성'들을 동정해 그들만으로 이루어진 마을을 만든 에보시의 행동에서 약자에 대한 폭력을 경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나무를 베고 요정들의 목을 원하는 인간들을 막으려는 아시타카의 행동에서 자연에 대한 폭력을 경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국주의는 기본적으로 약자나 자연에 대한 폭력을 전제로 하는 파괴적인 사상이다. 따라서, 폭력에 대한 비판을 주제로 하는 작품에서 제국주의를 찾는 것은 모순이다. 또한, 모노노케 히메의 주인공 아시타카는 제국주의나 국가주의 사상의 가장 큰 적인 '본국에 동화되지 않은 소수 민족'이다. 제국주의의 적을 주인공으로 하는 제국주의 작품이 있다는 발상 역시나 비폭력적 제국주의가 있다는 발상과 마찬가지로 비논리적이다.
같은 도깨비 이야기를 다룬 이웃집 토토로와의 흥행 성적 차이가 모노노케 히메의 제국주의적 성격 때문이라는 발언도 있었지만, 이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굳이 작품에 드러나 있지도 않은 사상에서 이유를 찾지 않더라도, 이웃집 토토로와 모노노케 히메의 흥행 성적 차이를 설명할 만한 이유는 많다. 이웃집 토토로는 스튜디오 지브리가 비교적 무명일 때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에,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개봉관도 비교적 많지 않았으며, 당연히 극장판으로는 흥행에 실패했고, 비디오나 캐릭터 상품으로 성공한 영화이다. 이웃집 토토로가 스튜디오 지브리를 독보적인 위치로 올려 놓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마크에 토토로가 그려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또한, 이웃집 토토로에 비해 모노노케 히메는 매우 극적이고 화려한 영상을 보여 준다. 영화가 극적이고 화려할수록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고, 흥행 성적이 뛰어나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이렇게 차이를 설명할 만한 믿을 수 있는 이유가 많은데 굳이 영화에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한 사상에서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다.
또한, 이런 비판을 한 사람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성향을 무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천공의 성 라퓨타와 같은 초기작에서 미야자키는 시타의 입을 빌려 반전적이고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최근작인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도 줄거리에 무리를 주면서까지 하울의 입을 빌려 전쟁만은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붉은 돼지에서 전쟁에 지쳐 스스로를 돼지로 바꾼 비행기 조종사를 다루고 있다. 한국에서 있었던 인터뷰에서 스스로 인종주의자나 제국주의자가 아니라고 밝혔으며, 영화를 통해 반전주의를 말한 그를 애써 제국주의자라고 비난할 필요는 없다.
물론, 전설을 다루었다는 이유로 이 영화가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왜곡될 여지는 있다. 그러나 '왜곡당할 여지가 있는지'에 대한 지나치게 철저한 분석으로 시간을 허비한다면,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아무리 전혀 관계없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누군가 악의를 품은 이에 의해 왜곡될 여지는 언제나 있다. 그리고 그런 왜곡의 책임은 왜곡한 사람에게 있지, 불운하게 왜곡당한 사람에게 있지는 않다. 오히려 누군가 한 작품을 왜곡한다면, 그 작품을 만든 이는 피해자로 불려야 할 것이다.
모든 외국 문화, 특히 일본 문화에서 제국주의와 국가주의를 찾으려고 하는 이들은 대부분 정말 제국주의나 국가주의에 대해 걱정하는 이들이라기보다는 한국의 국가주의자들(혹은, 민족주의자들)이다. 한국의 국가주의는 다른 나라의 국가주의와 달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목적에서 태어났다는 면에서, 일본 제국주의와는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를 지킬 필요??? 적어진 지금, 만약 한국이 강국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면 한국의 국가주의는 언제든지 새로운 제국주의로 탈바꿈할 수 있다. 국가주의적인 신념에서 비롯된 모든 외국 문화에 대한 배척은 일제 침략기의 유물로 꺼내서는 안 될 과거의 창고에 남겨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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