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D. Completely.  
Front Page
Tag | Location | Media | Guestbook | Admin   
 
038. 엘프 - 반지의 추억
'진실로, 그것은 먼 옛날의 이야기였습니다.'

머리 긴, 성별조차 짐작하기 힘든 도깨비(elf)가 운을 떼었다. 내가 생각하던 도깨비에 비해서는 인간다운 모습이었고, 가장 놀랍게도 이의 숫자와 크기로 볼 때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발음들을 능숙하게 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그 녀석은 도깨비일 뿐이었다. 굳이 내가 분류학을 공부하고 있어서라기보다도, 그 도깨비의 왜소한 체구와 일그러진 얼굴은 정말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이봐, 도깨비 씨, 거짓말이라도 한다면 그 길다란 팔을 잡고 돌려 주겠어.

'당신은 이 반지를 보고 계시군요, 하기야 이 반지와 떼어 놓을 수 없는 사연입니다만...'

특징적인, 질리는 말투였다. 바로 이것 때문에 나는 도깨비를 싫어했다. 어떤 괴생명체도, 연구소장의 어설픈 인공 지능 프로그램도 이것보다는 나았다. 너는 작고 끔찍한 꼬마도깨비일 뿐이야, 이 녀석아. 네가 무슨 거만하게 배를 두드리는 부호라도 된다는 거냐. 하긴 도깨비들이야 관광업으로 돈은 많이 벌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덜 흉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덜 짜증나는 것도 아니었다.

'또 뭡니까 이번엔.'

이쯤 되면 나도 어지간히 질렸다. 그 녀석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건,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늘어놓는 그 9세기풍의 장광설은 정말 졸렸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치는 소리가 더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토끼 귀 같은 그 뭉뚝한 귀를 잡아당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나는 녹음기를 꺼냈다.

'아시겠지요, 배우는 이여, 제게도 들판을 토끼처럼 달리던 시절이 한때에는 있었습니다. 정녕 빛나는 계절이었습니다. 사랑스럽기 이를 데 없는 아름다운 계절이었습니다. 제게 이 반지를 넘기고 간 청년만큼이나 사랑스러운 세월이었지요.'

내가 몇 번씩이나 졸면서도 눈치를 주었지만 도깨비의 말투는 그대로였다. 그처럼 긴 9세기풍 문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말을 막고 싶었다. 하지만 별 수 있겠는가, 그런 지겨운 일은 언제나 신참의 몫이었다. 내가 투덜대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나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어떤 방식으로든 어차피 도깨비에게서 많은 말을 이끌어 내고 기록하는 것이 내 임무였다.

'그 청년을 눈 속에 비출 수 있던 그 누가 그를 흠모하지 않겠습니까, 빛나는 눈으로 앞날을 보며 스스로는 항상 자신의 종말을 향하고 있다면서도 그 말투는 순박하기만 했던, 그 어린 청년을 말입니다. 숲 밖으로 나가기 힘든 저희 도깨비들에게 있어서 앞날을 바라보는 눈은 얼마나 귀중한 보배이겠습니까. 그 청년이 지친 다리를 쉬어 가려 숲에 머물 때마다 저는 숲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도깨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이마에 흐른 땀을 짤막한 수건으로 닦아 냈다. 팔은 길었고 손가락은 여섯 개였지만 도깨비들은 손을 잘 쓰지 못했다. 살아가는 환경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런 도깨비들의 객실을 청소하고 관리해야 하는 내게는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손을 아무리 못 쓴다 해도, 방을 돼지우리처럼 쓸 필요는 없을 텐데.

'하지만 청년의 말을 알아듣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늘 제가 모르는 말들로만 이야기를 이어 나갔기 때문일까요, 아니라면 단순히 그 청년이 저보다 맑은 정신으로 살아갔기 때문일까요... 다시는 올 수 없다는 청년의 말조차 저는 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또 다시 저 이야기인가, 대체 저 자들에겐 뭐가 흥미로운 이야기일까? 나는 잠시 이 이야기들이 서로 얼마나 비슷한지 생각했다. 인간이 인간의 언어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줄거리도 손꼽아 셀 정도라는데, 하긴 저 도깨비들이라고 해서 뭐가 다르겠는가. 믿기는 힘든 옛말이었지만 도깨비들을 볼 때마다 그 말이 맞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겁니까.'

'그 때 그 청년이 남기고 간 것이 이 반지였습니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그 숲을 다시 볼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그는 말하며 제게 이 반지를 건네 주었고, 그의 소식은 다시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 그 어떻겠습니까, 그 기억은 여기에 선명히 남아 있거늘.'

도깨비는 입가를 웃는 듯 일그러뜨리면서 손을 내밀었다. 긴 팔 끝에 혹처럼 달린 손에 빛나는 반지가 끼워져 있어다. 별 생각 없이 나는 그 반지를 도깨비의 손가락에서 빼냈다. 도깨비는 고함을 질렀지만 무시하고 반지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다른 것은 지워지고 눌려서 확인할 수 없었지만, 보석에 새겨진 기호는 남아 있었다. 고향에 남겠다고 하며 나를 연구소로 보냈던 쌍둥이 형제의 것이었다.

'눈이 빛나는군요. 그 청년에 대한 그리움입니까, 그 청년이 떠나간 이유에 대한 자각입니까?'

도깨비를 다시 객실로 빨리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여러 가지입니다. 하지만 그 모두, 도깨비인 여러분이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BLOG main image
Si man i yulma nin enquantuva?
 Notic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08)
공지/방명록 (3)
일상 (3)
(1)
이야기 (17)
번역물 (20)
씹어대기 (0)
기타 창작 (32)
On LotR (10)
Watching Animations (22)
 TAGS
삽질성 패러디 TSP 추천곡 NGE 삽질 과학삽설 The Project OST 불의넋 검색어순위 UQW
 Calendar
«   2009/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Entries
앞으로의 계획
블로그 재개장.
갑자기 궁금한지라... (1)
블로그 닫습니다. (1)
NGE 화보집 인물소개 번역 01. Ritsuko Akagi
REIDEEN ED - 駆け足の生き様
개념글 (2)
먼 바람이 들려오는 곳 06.01. (2)
먼 바람이 들려오는 곳 prologue (2)
Ode to Ritsuko AKAGI 2
 Recent Comments
절대 공감입니다! 특..
테시 - 2008
오오....자작시이신..
테시 - 2008
그렇죠 그렇죠 페아..
Asuka Feanaro HR - 2008
저도 페아노르 너무..
테시 - 2008
네 그렇습니다 여자..
WindFish - 2007
때가 될 때까지 기다..
Tumnaselda - 2007
음역이 대세인 듯하..
Asuka_Feanaro - 2007
antithesis -> 안티..
iqoo - 2007
...별로 오덕하지 않..
Asuka_Feanaro - 2007
;;; 저도 Atkins에게..
Asuka_Feanaro - 2007
 Recent Trackbacks
2007년 초여름 『신..
[미르기닷컴] 外傳
2007년 『신세기 에..
[미르기닷컴] 外傳
 Archive
2007/11
2007/10
2007/09
2007/08
2007/07
 Link Site
강철의 가택연금술사
명랑사회 선진조국 - ..
벨푼트의 호숫가 산장
산왕의 건전성추구위원회
 Visitor Statistics
Total : 56,279
Today : 14
Yesterday : 23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