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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해당하는 글(17)
2007/08/03   개념글 (2)
2007/06/09   몽골 관제기행문 (4)
2007/05/23   과학을 위한 변명 (4)
2007/05/14   작년 인문발표 논문 서론
2007/05/08   금주의 추천곡 (2)
2007/01/01   근황.
2006/09/22   나는 왜 일본 대중 문화를 즐기는가 (7)
2006/09/15   한국에서 판타지는 무엇인가 (2)
2006/08/24   죽음의 종교 1편 - 미완성 (2)
2006/06/03   지리산 종주 소감문-1


개념글
Science is incompatible with religion, regardless of what the religious, desperate to preserve their dwindling patch, may say.
The worst type of religion - such as the junk intellectual deceitful pulp peddled as creationism - seeks to undermine the one true way we have of arriving at an understanding of our wonderful world, which is by publicly shared experimentation allied with thoughtful reflection, and undermines the ability of people to think honestly, which is what education should be about.
Even the more respectable forms of religion, such as institutionalised Christianity and Islam, propagate manifest nonsense that is totally incompatible with our scientific understanding of the world and can lead to the adoption of attitudes with appalling consequences.
These religions should be taught only as a part of our cultural history, for their impact there is undeniable, but they should be presented only as quaint ways of disguising ignorance, propagating wishful thinking, and exercising power over the ignorant and weak.
- Peter Atkins(물리화학 교과서 저자)

Creationism is bad science and bad religion. Neither has a place in our schools.
Good science reveals the evolution of life on Earth over billions of years. Good religion will come to terms with, rather than reject, the facts about our evolutionary past.
- Sir Neil Chalmers(영국 자연사박물관 관장)




몽골 관제기행문
  몽골에서의 한 주는 짧기 그지없었다. 일본 오오사카에는 이미 두 번 가 보았다는 것 때문에, 그리고 몽골이라는 낯선 땅에 발을 딛는다는 것은 굳이 “야만 세계”를 탐험한다는 식의 주민들에 대한 무지한 우월감이 없다고 해도 즐거운 일이기에, 그 한 주 동안 외로웠을지는 몰라도 결코 괴롭다고는 할 수 없었다. 평소 거친 일을 어느 정도 많이 해 보았다고 자부하던 터였기에 몽골에서의 일정을 처음 보았을 때 전혀 당황하지 않았던 나이지만, 정작 그 간단하고 거칠다고만 생각했던 일들을 해야 했을 때 다시 아파 오는 허리에 괴로워하며, 충분히 할 수 있을 듯했던 모든 일들이 계속될 때 얼마나 힘든지 깨닫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신문이나 방송과 같은 기관에서는 현재의 직업난이 힘들고 단순한 일을 피하려는 사람들의 경향성 때문이며 그런 “게으름” 때문에 외화가 새어 나가고 있다고 하지만, 3D 업종을 기피하는 빈곤층의 심정을 게으름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비인간적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비록 교훈이나 감동 같은 것을 믿지 않는 나이지만, “편하게” 살아 왔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너무나 큰 불편이 아니겠는가.

  그런 힘든 일을 마침내 끝냈을 때, 내가 느낀 것은 그 어떤 보람이나 깨달음보다는 그 정도의 일이 주민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에 대한 걱정이었다. 나와 동료들이 만들었던 흙벽돌이 약하기 그지없다는 것은 그 벽돌을 부수어 진흙을 만들었던 내게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더구나 하루 소득 1달러 미만의 빈곤 상태라는 국가의 학생들을 보면서 그 학생들의 괴력에 가까운 체력과 시력에 경탄하고, 나무 판자를 밟고 올라가서 농구대를 설치하는 끈기에 놀라게 되었을 때, 나는 그들이 과연 한국인의 도움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 것인지, 또는 농업과 목축업을 주로 하기에 “어쨌든 먹고 살 수 있는 나라”에서 대체 소득이란, 그리고 경제 발전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몽골의 사막화 때문에 목축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사막화조차도 풀과 나무를 더 심으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것, 불필요한 산업화를 도입해서 몽골이 지불하게 될 비용보다는 그런 정도의 불편쯤이야 감수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자급자족할 수 없는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작은 나라들에게는 산업화가 절실했다고 해도, 충분히 땅에서 나는 그 모든 것을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몽골과 같은 나라에 굳이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도입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그런 믿음은 마지막 날, 몽골의 도시와 자연을 번갈아 보면서 더 커졌다. 도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교외라고 할 법한 작은 판자촌들은 너무나 흔하게 여겨졌다. 전날 분명히 깊이 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버스 안에서 잘 수 없어 나는 울란바토르의 교외를 별 수 없이 바라보아야 했다. 나름대로 도시답다고 여겼던 시가지에 비해 도시 인구의 대부분이 살고 있다는, 수도도 전기도 없어 초라하기 그지없는 판자촌과 천막촌을 바라보는 심정은 얼마간 착잡했다. 단순히 소련 때문에, 그리고 러시아나 미국 때문에, 초원을 유목하며 평화롭게 살던 몽골인들은 왜 공산주의라는, 그리고 개혁과 개방이라는 굴레에 매인 것일까, 그 두 나라가, 그리고 중국이 몽골에 얼마나 큰 역사적 피해를 주어 왔던 것일까. 한국인들은 일제 강점기 36년이 한국에 끼친 피해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괴로움을 겪어 온 몽골인들도 그러할까. 결국 산업화를 되돌리기는 적극적인 노력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법, 얼마 안 되는, 강이 흐르고 나무가 자라는 지역과 같은 곳마저 결국 산업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을 두려워하며 애덤 스미스와 밀과 케인즈, 혹은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역사나 경제 이론이 얼마나 농경 사회에 “최적화된” 것인지 또 다시 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소감이나 깨달음을 봉사 활동에서 얻어 가고, 그런 깨달음을 한국에 돌아가서까지 “실천하기”를 바라는 것은 학교 당국의 과욕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개성이 강한 학생들이 많다고 학교 당국에서는 주장하지만, 이 학교의 학생들은 다른 어느 학교의 학생들보다도 더 심한 동질 집단이요, 거의 대부분 비슷한 환경의 가정에서 비슷한 교육을 받으며 살아 온 이들이 아니던가? 굳이 자세한 설문 조사 따위를 하지 않아도, 이 점은 학생들의 가정 환경 조사서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빈곤에 허덕이던 학생을, 학원 한 번 다녀 보지 않은 학생을, 혹은 농촌에서 자라난 학생을 찾아보라. 이 학교 학생들 중에서는, 최소한 06학년도 입학생 중에서는, 아무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은 불을 보듯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전혀 가난하지 않은 자신의 가정을 마치 매우 가난했던 듯 묘사한 이 학교의 어떤 졸업생을 비판하지만, 실제 이 학교에서 무산-중산 계급의 중간층에 해당하는 그의 가정은 정말로 가난했던지도 모른다. 그처럼 이 학교의 속성 중 하나인 소시민 혹은 준산 계층 출신이 대다수라는 점은 절대적인 특징이다. 그렇기에 결국 비슷한 계층에서 자라나 비슷한, 그것도 특화된 교육을 받으며, 마치 프랭크 허버트의 SF 소설을 연상시키는 “국가에 공헌해야만 할 인간 컴퓨터”로서 훈련받은 그들에게 국가와 학교는, 그리고 국민은, 어떤 개인적인 차이를 기대해야 할 것인가. 또는, 어떤 개인적인 차이를 기대하려고 하는 것인가. 생물의 속성에 있어 비록 체계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흔히 자유 의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무작위 변수(random factor)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설령 그것이 신경생물학적 실험이라고 하여도 그 변수는 변인의 지극히 일부분만을 차지한다는 것 정도는, 과학을 약간만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개성과 창의성을 길러 준다는 주장이 공허한 것인 만큼, 그들이 여태까지 살아 온 동질적인 삶의 방식만큼이나 이 학교의 구성도 동질적이기 그지없다. 이번 봉사 활동에서 그들이 어떤 것을 얻어 갔는지는 그들의 삶과 관계되는 것일진대, 어차피 어떤 의미로든 모두가 같은 일정을 따라 같은 삶을 살아 왔을 바에야 그들에게 개성과 특수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일까. 기실 이 점은 이 학교에서 좀 더 극명하게 드러날 뿐, 모든 현대인들에게 마찬가지일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합리성과 효율성을 중요시하게 만든 것은 자본주의의 원리이다. 하지만 그런 “돈 놓고 돈 먹기”라는 자본주의의 원리를 부정하는 봉사와 복지에서까지도 합리성과 효율성, 그리고 그 때문에 생겨난 또 다른 근대적인 관념인 “질서”가 강조된다. 사실 그것이 아니라면 봉사 활동을 하기 전에 굳이 체조 따위를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도 규정된 형식의 체조를.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았고, 불필요한 제도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국민은 항상 거의 없다. 이처럼 이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어떤 종류의 자유를 준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 구성원들은 자신이 항상 배워 왔고 자신이 스스로 “택한” 그 질서 내에서 행동한다는 면에서,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 어디에 있든 간에 자신이 속한 사회 내부에서 방목되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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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 UQW, 공부, 삽질


과학을 위한 변명

일반인들, 그 중에서도 무슨 이유인지는 도저히 모를 일이지만 특히 스스로 인문학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과학에 대해 수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이런 오해의 엄청난 숫자와 엄청난 비현실성은 굳이 따로 거론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일 따름이기에, 대부분의 과학자들, 혹은 과학에 대해서 약간의 개념이나마 가지고 있는 이들은 오히려 이런 사실들을 지적해야 한다는 점에 이유 없는 죄책감을 느낀다.

이런 오해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인문학적 상대성과 과학적 절대성에 대한 오해인데, 인문학에 과학적 방법론이 적용되게 된 것은 인문학을 위해서는 행운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의 상대성이 과학에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수많은 자칭 인문학자들은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인문학적 현상들을 해석하는 여러 가지 방법론과 여러 가지 결론이 있을 수 있다 해서, 자연 현상도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과학 혁명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이후로, 과학철학적으로 볼 때 과학적 사실이 갖는 특징을 반증 가능성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는 곧, 변인 통제와 적절한 대조군을 포함하는 수 차례의 실험에 의해서 어떤 이론이나 사실을 입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을 경우에만 이 이론을 과학적인 명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과학은, 최소한 제대로 된 과학은 결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이미 알려진 사실을 속이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 유치한 비유이긴 하지만, 누가 자기를 지키겠다고 자기 무덤을 파고 있겠는가?

따라서, 과학 이론이 시대를 거처 아무리 변한다고 해도, 그리고 시대를 거쳐 가면서 이론들을 도출해 내는 데 쓰인 방법론이 약간이나마 변한다고 해도, 최소한 내가 공부하고 있는 생물학에서는 과학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 언제나 하나뿐이며 항구여일하고 절대적이다. 흔히 현대의 인문학자들 중에는 이런 믿음이 종교와 무엇이 다르냐면서 씹어 대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주라는 하나의 계(system)가 움직이는 기본적인 원리에 서로 상충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을 하나의 계로는 분류할 수 없다는 것은 증명할 필요도 없이 자명하다. 결국, 최소한 어떻게 보아도 비교적 균일하고 극단적이지 않은 환경의 지구에서 측정할 수 있는 자연 법칙은 그 역시 균일하고, 그 역시 극단적이지 않다는 것을 최소한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현대 철학이 말아먹은 자유, 평등 따위의 수많은 다른 관념들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진리라는 관념 역시 철학적으로 변용되는 것을 너무나 자주 볼 수 있다. 철학적인 의미에서 진리는 관측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 "본질"을 뜻하지만, 과학적인 의미에서 진리라는 것은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인간의 관측 결과를 토대로 해 얻은 것이다. 굳이 인간이 관측할 수 없는 것을 과학이 증명하려 하지 않는 것은 과학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건 원래부터가 과학이 다루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문학자들에게 분자의 회전 운동을 인문학적으로 설명하라고 한다면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과학자의 윤리성에 대해서는 사실 인문학자들뿐만 아니라 과학자들도 충분히 우려하고 있는 문제라는 것을 또한 말해 둘 필요가 있다. 최소한 리처드 파인만과 같이 과학 연구는 항상 윤리적으로 중립적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자는 요즘에 찾기 힘들다. 그런 과학 연구를 사람들이 어떻게 말아먹는지 모르는 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 역시, 과학의 문제라기보다는 과학이 이용되는 사회의 문제로서, 과학자들은 과학자가 아닌 사회의 일원으로서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윤리성에 대한 해답을 과학에서 찾는 것은 연목 구어일 뿐이다. 그런 식의 절대적인 진리가 필요하다면, 오히려 과학보다는 수학에 대해서 어줍잖은 지식을 쌓는 것이 어떻겠는가?

물론 과학도라고 하기에는 퍽이나 난감하지만, 과학을 약간이나마 배운 입장에서 학자를 자처하는 자들의 이런 망언은 들어 주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해서 짧은 rant를 이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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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 과학삽설


작년 인문발표 논문 서론
 한국 학생들, 특히 미국 유학이나 특수 목적 고등학교 등을 노리며 미래의 엘리트로서 교육받는 학생들에게 있어서 리더십이란 성적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정성적이며 정량적인 능력의 척도이고, 엘리트 계층에 편입될 수 있을지의 여부를 가르는 잣대이기도 하다. 몇 년 전 한국 각지에 나타난 리더십 훈련소, 그리고 한국에서 각광받고 있는 유학 안내서들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제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반장을 맡으려는 학생들을 말리던 학부모들은 리더십을 증명하는 척도가 된다며 소극적인 학생들에게까지 반장이 되기를 강요하고 있고, 학생 개인의 원활한 학교 생활보다도 리더십을 가름하는 생활 기록부를 위해서 소심한 학생들을 걱정한다. 하지만 과거의 군사 정권 시기에 비해 구조적인 면에서나 일반인들의 의식이라는 면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진 현대 사회에서 권력을 분배하기보다는 스스로 권력을 쥐고자 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보통 역사에 기록되는 이들은 한 사회의 지배층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광기의 시대라고 불리던 20세기 전반이 지나간 지도 이제 60년 가까이 되어 가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시대를 살던 일반인들보다 그 시대를 그런 광기로 몰아 간 지도자들이다. 뛰어난 언변과 어느 정도까지 설득력있는 논리, 여러 가지 집단적 최면 기술을 통해 이러한 지도자들은 자신의 뜻에 따라 한 집단을 좌지우지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물론 현대에는 역사학이 다른 여러 학문과 접목되면서 지도자가 아닌 일반인의 생활에 초점을 두기도 하지만, 여전히 주류 역사학에서는 지도자들의 열전을 역사의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으며, 어떤 역사적 사건을 주도한 지도자들일수록 크게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이것은 한 국가나 집단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그만큼 그 집단 전체의 움직임을 조절할 만한 능력이 있는 이들이었다는 점을 볼 때, 오히려 거시적 역사학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인 사실은 지도자 혹은 독재자로 불리던 이들이 더 이상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문제를 일으키기 어렵게 하는 정치적 장치들이 하나씩 고안되고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 다원화된 사회로 일컬어지는 현대에 오히려 사회의 각 계층에서 현대인의 중요한 자질로 사회성과 지도력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철학과 정치가 태동한 고대에서부터 강조되었던 지극히 고전적인 가치관이며, 비록 도가 사상이나 아나키즘과 같이 지도자나 사회 구조 자체가 내재하는 문제점을 지적한 경우도 있었지만 언제나 이러한 철학은 주류 사회에서 밀려나야 했다. 멀게는 플라톤의 [국가]에서 가깝게는 파시즘과 더 나아가서 신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주류 철학계에서는 한 집단 내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해 왔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여 또한 그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다른 어느 것보다도 현대의 리더십 열풍에서 흥미로운 것은 리더십을 강조하는 이들이 이제 고전 철학 서적을 들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물들은 한 손에 고액권 수표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값비싸고 성능이 우수한 통신 장비를 든 채 설교를 늘어놓는다. 일반적으로 이 사람들은 기술이 발달하고 커뮤니케이션이 다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현대 사회에서는 얼마나 다른 여러 사람과 협력할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결코 [과거와 같이 지식만으로 생존할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 리더십을 강조한다. 현대 사회에 대한 이론이 그 이론의 발원지에서보다도 먼저 퍼져 나가는 한국 사회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미래 사회에 적응한다는 말은 그 어느 명저보다도 더 큰 효력을 갖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리더십의 유무가 돈과 사회적 성공에 직결된다는 이유로, 오히려 유학 가이드보다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등장할 법한 말인 ‘지도자의 자질’은 수많은 학교와 학원의 홍보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말이다. 한국의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명문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입학하여 부와 명예를 걸머쥐기 위해 말없이 수천만, 혹은 수억의 돈을 각종 학원과 과외에 투자한다. 스스로의 ‘경쟁력’이 뒷받침되지 않을 때 지적 능력은 별다른 효용성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그런 홍보지들을 통해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사회에 국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한국 사회처럼 ‘리더십 훈련 학원’이 존재할 정도는 아니라 해도, 대부분의 어느 정도 신자유주의화된 사회에서 이미 리더십은 미래에 돈과 명예를 원하는 이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질로 자리잡았다. 현대 사회에서 협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파하면서, 모든 자기 소개서에는 공동체 활동에 얼마나 활발하게 참가했으며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지 쓰는 것이 보편화되어 가고 있다.

특히 미국과 같은 사회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리더십이 기존의 특권층에 속하는 것과 종종 중복된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학창 시절에 사회적인 활동을 많이 했느냐와 무관하게 종종 명문 학교의 학생들은 일반 학교와 ‘달동네 학교’의 학생들에 비해 리더십 평가 면에서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한다. 빈민가의 고등학교에서 높은 성적을 얻은 인물이라 해도 빈민가의 고등학교를 졸업해 ‘리더십이 없다’는 이유로 명문 고등학교를 평범한 성적으로 졸업하는 학생보다 미국 대학 입학에 불리하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다. 리더십이라는 용어의 불분명한 기준에 힘입어 이러한 조건은 사회에서 이미 사회적 성공을 지닌 이들을 특별히 걸러 내는 데에 종종 활용된다.

즉, 현대의 리더십 열풍은 단순히 고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많은 사상이 스쳐 지나가는 과정에서 지도자를 언급한 것과는 그 비중이 같다고 할 수 없다. 철학이나 역사학과 같은 인문학이 자연 과학이나 공학에 비해 퇴조를 보이는 시점에서, 그 어떤 사상적 전통보다도 리더십 열풍을 부추기는 것은 돈과 명예에 대한 기정사실화된 약속이며, 현대 사회일수록 다른 어떤 사회에 비해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는 광고지를 쥔 연설가들의 흡인력 있는 목소리이다. 이에 비해, 리더십 열풍은 한국의 인문학계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진 적이 거의 없는 분야이다. 이 때문에 이 글에서는 리더십 열풍이 역사적으로 갖는 위치를 다루고 리더십 열풍의 원인을 분석하며, 현대 사회의 가치와 얼마나 일치하며, 이런 리더십이 한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 실제보다 더 각광받고 있는지 기술할 것이다.
Tag : 공부


금주의 추천곡

Sailor Star Song - 하나자와 카에/미소녀전사 세라문 세라스타즈 OP
Wings of Destiny - Rhapsody/Symphony of Enchanted Lands
ソラヲミロ - 사카모토 마아야/少年アリス
雨上がりの橋の上で - 우에다 카나/펌프킨 시저스 OST
もう一度TENDERNESS - 하마구치 츠카사/기동전사 V건담 ED2
We Believe You - 시노하라 에미/미소녀전사 세라문 주피터 IM

*이번 주부터는 곡도 함께 올립니다.

Tag : 추천곡


근황.

誰かの爲に生きてこの一瞬が全てでいいでしょう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 이 순간이 전부라면 괜찮잖아
見せかけの自分はそっと捨ててただ在りのままで
보여 주려는 자신은 살며시 버리고, 단지 있는 그대로
("Fate/Stay Night" 오프닝곡, "disillusion" 중에서)

...정말, 유치하지 않습니까?

사실 좋아하는 노래였습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온갖 삽질을 다 겪었음에도 로맨티스트라는 탈에서 벗어나지 못한 저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오늘도, 심각한 저음불가 현상에 시달리면서 부른 노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깨달았습니다.
인간이 놀림거리가 아닌, 웃음거리가 아닌 한 사람의 독립된 개체로 취급받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말입니다. 스스로 상대를 완벽히 신뢰하고 건넨 말이, 스스로 완벽히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사람이 제 뒤에서 나누는 여러 가지 말들을 상상하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상상하지 않아야겠지요. 그리고 그 편이 제게도, 그 사람에게도 더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상상했어야 했습니다.
어쩌면, 상상하지 않았더라면 눈치채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이 얼마나 잘 속는 존재였는지도 깨닫지 말아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면, 그 모든 것을 예상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깨달았습니다.
결국, 스스로를 위해 지극히 현세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로맨티시즘은 언제까지나, 그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을 때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해서, 16일 이후에는 뵙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때 저는, 그리고 여러분은 어디에서 어떤 순간을 보내고 있을까요?

*이런 기분 때문인지, 어이없게도 세카이계의, 용도를 정하지 않은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세카이계라고 해도 작안의 샤나나 월희 같은 분위기보다는 아마도 에바나 라제폰 식이 될 것 같군요. 좌우간 그 글은 일단 연재해 보겠습니다. 어차피 진지하게 쓰는 글도 아니니까요.
모티프는 DNAngel 오프닝 백야의 '길들여진 자유가 있었다'라는 가사입니다.

추신: 타카하시 요코 신곡이 나왔군요.
또 무한버닝모드 돌입할 듯합니다.



나는 왜 일본 대중 문화를 즐기는가
  나는 일본 대중 문화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나 역시 자살 행위를 원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다지 내색을 하고 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이 비교적 덜 알려진 것들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되는 대로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양산형 판타지 소설을 붙들고 있고, 음악을 분류하는 범주는 '오프닝'과 '엔딩'과 '삽입곡'과 '이미지 앨범' 뿐이다.(이건 약간 과장이라 하지만, 내가 일본 애니메이션의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은 이 블로그를 오래 보신 분이면 모두 알리라 믿는다) 종종 미성년자에게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선정적 매체에 대해서 듣는 바도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매체의 내용에 대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파악하고 있게 될 경우도 있다. 물론 대중 음악이나 영화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무지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 문화 생활에 있어서 일본 문화는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이 사실이 한국 사회에서 내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매우 불편하다는 점은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같은 외국 곡을 듣고 있다 하더라도,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가사가 영어이냐 일본어이냐에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갖는 위상은 너무나 달라진다. 모노노케 히메나 언제라도 몇번이라도 같은 비교적 잘 알려진 노래를 듣고 있다면 약간 낫지만, 나와 같이 행복은 죄의 향기 같은 곡을 듣고 있을 경우에는 한국인들의 다양한 음악 취향과도 맞물려 상당히 골치아파진다. 최근 나는 '정말로 한국 노래는 듣지 않느냐'는 동료의 질문을 받고 곤혹스러워하다가 '어느 나라 노래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좋아하는 노래인지의 문제일 뿐이다'라고 답한 경험이 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외국 문화의 침투 따위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주류 문화에 있어서는 상당히 보수적이고 전통주의적이다.
 culture라는 말의 어원이 농경을 시작하면서 문화가 발생했다는 데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문화(culture)는 한 사람이 어떻게 양육되었는지(cultured) 나타내어 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상당히 파시즘적인 문화는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길들여져 온 방식에 충실한 것이며, 이것은 그 어느 사회 집단의 문화에도 적용할 수 있는 명제이다. 이 때문에,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길들여진 어떤 사람이든 그 인물의 기억과 성격이 형성되는 과정(정확히 말해서, 정신적 성숙이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는 만 20세경까지의 과정)에서 한국의 환경에 처했다고 할 때 결코 정신적으로 한국이 아닌 어느 나라의 문화적 국민이 될 수 없다. 한국 학생들이 아무리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 고전 문학을 많이 접한다 해도 그 사람들은 이후 현대인의 사고 방식을 갖게 되는 것도 일상 생활에서 그들이 처한 환경이 지극히 '한국적'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는 나와 같이 외국 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혹평하는 이들 중 비교적 온건한 사람들이 말하는 '한국의 외국화'가 억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어떤 사람이 외국 문화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해도, 그 사람의 성장 배경이 한국인 이상 그 사람의 의식 구조는 한국인을 벗어나기 어렵다. 문화의 주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행동 방식 및 사고 방식은 거의 조건 반사적인 과정을 통해서 한 사람의 의식에 새겨지기 때문에, 한 번 각인된 이후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실험을 위해 새끼거위들이 자신을 어머니로 인식하게 한 몇몇 동물 행동학자 및 호기심 많은 실험자들이 실험이 끝난 이후에도 새끼거위들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조건 반사를 통해 얻어진 경험은 다른 기억에 비해 잊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무리 외국 문화를 많이 접한다 해도 어떤 사람의 의식 구조가 변하는 것은 그 사람이 한국을 매우 오랜 기간 동안 떠나 있지 않는 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무언가가 '안전하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민족의 개념을 부인하는 나로서는 민족적 정체성과 같은 것에는 전혀 무관심하다고 할 수 있고, 외국 문화에 지나치게 익숙해지면 한국 사회에서 생활하기 어렵다는 말에 대해서도 생활 환경이 한국인 이상 의식 구조가 외국 문화적으로 변하기는 지극히 어렵다고 생각하기에 외국 문화를 즐기는 것이 위험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일본 문화를 즐기는 이유는 그것이 안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 문화에는 내가 즐길 만한 요소가 여럿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즐기는 일본 대중 문화는 지극히 한정적인 부류에 속한다. 애니메이션 업계를 중심으로 해 종종 애니메이션화를 염두에 두고 쓰이는 양산형 대중 소설로부터, 애니메이션의 주제곡과 사운드트랙까지, 행동 양식으로든 전문 지식으로든 오타쿠와는 거리가 먼 나는 오타쿠로 불릴 정도로 애니메이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외의 분야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것이 거의 없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으며, 이름난 일본 영화 감독이 누구인지도 말할 수 없고, 하마사키 아유미의 최신 앨범이 언제 출시되었는지도 대답해 줄 수 없고, 일본 드라마가 평균 몇 편 정도 되는지도 이야기할 수 없다. 즉, 애니메이션을 제외한 일본 문화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두세 번의 걸친 관광을 통해 일본의 유적지를 둘러보아 얻은 지식과 역사서 몇 권에서 얻은 지식뿐이다.
  내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유는 하지만 의외로 간단하다. 애니메이션은 다른 어떤 매체보다 간단하게 공상을 '구현'할 수 있는 매체에 속하기 때문이다. 게임처럼 귀찮은 프로그래밍을 하지 않아도, 영화처럼 촬영 가능한 장면에 집착하지 않아도, 애니메이션에서는 얼마든지 자유로운 표현을 할 수 있다. 환상 문학을 모든 문학 중 가장 즐기는 내게 있어서, 이것만으로도 한 장르에 대한 호감을 갖기로는 충분하다. 내가 가장 처음 접한 일본 애니메이션인 '평성 너구리합전 폼포코'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다른 어느 것도 아닌 마치 숲 속에 도깨비나 인간으로 둔갑하는 여우가 살아 있을 것만 같다는 생동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현재까지도 가장 높이 평가하는 애니메이션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와 같은 이들은 그러한 자유로운 표현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이 아니었다면 라퓨타의 붕괴와 같은 장면은 몇십 년 후까지 절대 스크린에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단 더 섬세한 셀 기법을 자랑하는 미국 애니메이션이 아닌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까닭은, 거친 기법을 보면서 가끔씩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려는 목적도 있지만 셀 개수가 심각하게 부족하고 마감의 압박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연출력으로 '때우는' 모습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끔씩은 섬세함이 영상 매체의 특징인 과장된 표현을 약화시키는 모습도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 대중 문화를 즐기는 것과 역사적 괴수(leviathan)였던 과거 일본 제국의 실체를 부인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나는 역사적으로 20세기 전반부에 신생 제국주의 국가로서 일본이 세계 사회에 끼친 피해에 대해 한국의 다른 어느 누구만큼, 혹은 그들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 일본 대중 문화는 거의 무관하다. 가끔씩 제국주의 코드라며 등장하는 것들도 종종 어이없는 과민 반응이고, 자주 터져나오는 '일빠'와 '오타쿠'에 대한 이야기도 나로서는 가소로울 뿐이다. 문화적 국수주의는 (실제로 오히려 더 영향력이 약한) 문화적 사대주의보다 더욱 위험하다.


한국에서 판타지는 무엇인가
 나는 미국의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문학 창작 관련 영재 교육 프로그램을 수료한 경험이 있다. 환상 문학가를 꿈꾸는 나로서는 한국 대학 문학 창작과의 고루한 분위기나 포스트모더니즘 및 실존주의 등의 사상적 배경을 문학적 가치보다 더 중요시하는 듯한 태도가 상당히 불편했기에, 이 프로그램도 그런 양상을 띠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를 문학 창작 프로그램에 지원하면서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내가 환상 문학을 주로 쓴다는 사실을 강사에게 밝혔을 때, 눈대중으로만도 60세가 넘어 보이는 늙은 강사는 한국의 문학 창작과 교수들처럼 싫은 기색을 하기는커녕, 스스로도 톨킨의 열렬한 팬이라면서 환영하는 빛을 띠었고, FInal Project를 환상 문학 위주로 제출했는데도 성적이나 평가에는 전혀 영향이 없었다. 이런 미국의 개방적인 태도는 환상 문학가를 꿈꾸지만 기본적인 플롯 구성 등을 체계적으로 배우려 했던 내게는 매우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환상 문학을 쓰는 인물은 그 학급에 나 외에도 두셋이 더 있었기에, 나는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동료를 먼 이국 땅에서 처음 만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야 헸다.

  이미 유수한 과학 소설 관련 문학상인 휴고상이나 판타지를 넓게 포함하는 아동 문학상인 뉴베리상이 존재하고, 물론 주관적인 기준이지만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어슐러 K. 르 귄이라는 대작가가 있는 미국이나 톨킨 및 루이스라는 영향력 있는 작가들을 낳았고, 현재에도 필립 풀먼이나 조앤 K. 롤링과 같은 유명 작가들을 배출한 영국과 달리, 한국에서 환상 문학은 구전 문학 위주라는 특성상 상당히 오랫동안 문학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었는데도 너무나 좁은 위치만을 점유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경우 구전 문학적 전통 하에서 독자적인 문학이 발달하지 못한 채 일본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급히 [선진적인] 유럽 문학 사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탓이다. 물론 나는 전통이 서구 문화에 비해 무조건 우수한 것도 아니요, 전통을 살리자는 아우성이 가끔은 너무나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서구 문화의 무비판적인 수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서구 문화의 선택적인 수용이다. [근대화]와 [선진화]를 꿈꾸던 당시의 한국 지식인들은 실용주의적인 목적에서 그들에게 당장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거나 또는 식민지 시대라는 어두운 분위기에 걸맞도록 허무주의적인 문화만을 받아들여, 결국 사상이나 문예 사조의 스펙트럼을 이전보다도 더 좁혔을 뿐이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한국 문학은 사실주의, 허무주의 및 실존주의 등의 이미 유럽에서는 그다지 각광받지 못하는 사조에 얽매여 그와 다른 경향을 지닌 문학 작품을 인정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에 따라 그 사조에 어긋나는 과학 소설이나 환상 소설 등은 동화라는 이름을 빌리지 않고서는 문단에 설 수 없게 되었으며, 결국 만화책과 미성년자 관람 불가 잡지만이 범람하는 대여점에서 그 자리를 찾게 되었다. 한국의 환상 문학 애호가들은 이러한 종류의 한국 환상 소설을 [대여점 판타지]라 부르며 그들이 옹호하는 작가(이영도, 전민희 등)와 애써 구분짓지만, 어슐러 르 귄이나 존 톨킨, 클리브 루이스, 아이작 아시모프, 미카엘 엔데와 같은 작가들에 익숙해진 내게는 사실 이영도 씨나 전민희 씨의 글도 흔히 일컬어지는 [양산형 대여점 판타지]와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한국 전설을 이용해 글을 쓰겠다는 이우혁 씨의 글 역시, 자신의 지역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통해 The Dark Is Rising이라는 동화를 창출해 낸 수잔 쿠퍼의 글에 비해서는 빈약하기 그지없을 따름이다.

즉, 한국에서 판타지가 현실 도피 및 대리 만족 수단으로만 쓰이고, 읽히는 것은 내게 있어서 일종의 악순환으로 다가온다.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편협한 외래 문화 수용으로 인해 몇 가지 오래 된 사조에 얽매인 한국 소설에 환상 문학이 끼어들 여지가 없게 되자 환상 문학은 지극히 저질적이고 흔한 소재로 전락하게 되고, 이에 따라 한국의 환상 문학은 현실 도피와 대리 만족 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환경만큼이나 추락해 버린 환상 문학은 환상 문학을 그 이상의 무언가로 보려는 독자들에게 있어 아무런 가치도 가질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진부한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만, 그리고 내가 다른 무엇보다 증오하는 것이 바로 진부한 은유이지만, 진흙에서 피어나는 꽃이라고 해서 모두 진흙과 같은 빛깔을 띨 필요는 없고, 하늘을 바라보고 피는 곷이라 해서 모두 하늘과 같이 청명한 빛깔을 띨 필요도 없다.


죽음의 종교 1편 - 미완성
애초부터 크리스트 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나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이해할 수 없는 교리들이 몇 가지 있었다. 교리로서는 부족함이 없을지 모르지만, 아무리 신도라고 해도 최소한의 개념과 상식을 갖춘 인물이라면 누구든지 품을 법한 의문들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다. 다른 수많은 종교와, 그 중에서도 특히 유일신교들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교리들은 크리스트 교라는 체계를 벗어나는 순간 정말 당황황당스럽기 그지없는 이야기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들 중 하나가 당황스럽게도 내게 있어서는 [왜 크리스트 교와 상관없는 '멀쩡한' 어린이용 역사서들마저 예수의 죽음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양 서술하고 무엇보다 '억울한 죽음'으롷 서술하느냐]이다.

크리스트 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예수의 죽음은 사실이 될 수밖에 없고, 그들의 교리가 성립하기 위해서 그것은 억울한 죽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초대 교주였던 예수가 죽은 것이 신자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것이라는 점을 배제하고 예수를 단지 상징으로 생각해도 그 점은 마찬가지이다. 현세보다 내세와 종말 등속의 죽음에 대한 개념을 중시하는 교리에 비추어 볼 때, 예수라는 [상징]은 죽음으로 비로소 교리 안에서의 배역을 마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크리스트 교에서 하필 죽음의 상징이 되었으며 현재에도 비석으로 쓰이고 있는 십자가를 그들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쓰는 것 역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사실이다. 크리스트 교는, 리처드 도킨스가 문화적 모방자 이론을 제창하면서 지적했듯이, 죽음을 인간의 완결로 보고 종말을 중시함으로써 모방자로서 큰 이점을 가진다. 예수의 죽음과 십자가라는 상징들은 크리스트 교가 인간 사이에서 전파되는 데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미완성-


지리산 종주 소감문-1

 묘향산과 더불어 한국의 여러 산들 중 가장 신비로운 산이라고 하는 지리산에 다녀온다는 공지 사항을 처음 상욱 선생님으로부터 들었을 때, 내가 느낀 것은 희열이었다. 평소에 자연의 신비로움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강한 애착을 갖고 있으며 지금도 그러하기에, 나는 망가지지 않은 대자연에 대해 경외심을 갖거나 최소한 이제 인간에 의해 산산이 부서져 가는 이 지구를 향한 엄숙한 조의를 표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따라서, 지리산 종주 자체에 대해서 불평에 차 있던 많은 동급생들과 달리 나는 어느 정도까지는 그러한 체험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편이었으며, 지난 귀가주가 끝난 뒤 학교로 돌아오기도 그다지 괴롭지 않았다. 과연 어떠한 사고도 없이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평소에 해발 고도 300미터 이내의 낮은 산을 자주 다녔으며 지난 백양산 등반도 그리 힘들지 않았던 터라 그다지 괴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지리산 종주를 시작하고, 선생님들을 대신해 학생들을 인솔할 인물들이 나타났을 때 내 예상은 잔혹할 정도로 처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사전 설명을 제대로 듣지 않은 탓인지 나는 어디까지나 AA 선생님들과 산악 안전 요원들이 인솔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상 밖으로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이 나타나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부터 파시즘이나 제국주의가 남긴 부끄러운 유산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했으며, 그런 점이 아직 대한민국에 남아 있다는 것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수치심을 느껴 오고 있었기에, 예비군복이기는 하지만 군복을 걸친 교관들이 등장했다는 것은 나로서는 충격적이고 괴로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내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식으로 선생님들이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내가 이 지리산 종주를 통해 얻은 교훈은 내 삶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한 것에 가까웠다. 불편한 점이 많기는 하지만, KSA에 재학 중인 여학생이라는 사실은 나를 여러 사회적 괴로움에 대해 둔감하게 만들었다. 여학생이기 때문에 남성들에게 해당되는 군대에 대한 공포증에서도 면제될 수 있으며, KSA에 재학 중이기 때문에 전국의 수많은 고등학생들이 걱정하는 내신이나 수능 문제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 그만큼 내게 있어 그러한 제도적 모순은 한탄하고 분개해야 할 일일망정 그다지 절실하지는 못한 일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대한민국 사회라는 큰 체제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고민할 수는 있는 문제라 해도, 내 문제로서 맞서 헤쳐 나갈 수는 없는 문제들이었다.

 

 하지만 이번 종주를 통해 나는 그런 문제들을 내 문제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나아갈 방향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들이 말씀하시고, 강조하시던 것과는 다른 방향의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오로지 정해진 규율에 따르고 그 규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스스로의 사고를 그에 맞추어 단순화시키는, 즉 공동체의 틀에 자신을 왜곡시키면서 맞추어 나가는 공동체 의식은 군국주의의 유물일 뿐이다. 그 공동체라는 존재가 공동???의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큰 괴로움을 주며, 그 구성원들 개개인의 권익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서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 보는 방향의 공동체 의식에 대해 이 종주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흔히 공동체 의식이라는 말은 파시스트들에 의해 정해진 규율에 무조건 따르는 순종의 개념으로 정의된다. 파시스트라는 단어 자체의 어근이 되는 이탈리아 어 파쇼가 단결이라는 뜻을 갖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는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혼란스러웠던 20세기 초반의 시대 상황 속에서 태어난 파시즘에서 내세우는 공동체 의식은 원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공동체 의식과 너무나 판이한 성격을 갖는다. 서로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에서 처음 생겨났던 규칙은 점점 복잡해지고, 그러한 규칙이 복잡해질수록 그 규칙은 개개인을 속박하는 짐이 되고 만다. 이에 따라 본능을 따르는 수많은 이들은 그러한 규칙을 무시하게 되고, 결국 이러한 이들마저 통제하기 위해 불필요한 규칙까지 생겨나게 된다.

 

 이번 종주에서 이러한 불필요한 규칙들은 여러 방향으로 나타났다. 수많은 학생들이 특히 불쾌해한 부분인 큰 목소리로 구령을 붙인다거나 주머니에 손을 넣지도, 무선 통신 장비를 사용하지도 못하는 규정은 기실 산에서든 산을 내려와서든 큰 소용이 없는 것들이었다. 큰 목소리로 구령을 붙이는 것은 나름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고 또한 호흡을 어렵게 해 등산에 오히려 지장이 된다는 것은 굳이 산을 올라 보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기본적인 지식만 있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는 일 역시, 균형을 잡을 도구가 없어진다는 면에서 안전에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두 손으로 돌을 들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을 볼 때, 돌을 드는 것보다 덜 위험하면 덜 위험했지 더 위험할 리는 없는 사항이었다. 무선 통신 장비 역시, 깊은 산 속에서는 어차피 사용할 수 없었으니 논외이지만 산을 내려와서 사용한다고 해서 안전에 문제가 생길 요소는 아니었다.

 

 , 규정으로 이루어진 어떤 체계가 더욱 복잡해질수록 그 체계 속에서 불필요한 규정의 수는 증가한다. 법의 역사가 오래 된 나라의 경우 종종 효용성이 전혀 없는 법이나 현재에 통용하기에는 부적절한 법이 발견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그 법이나 규정이 통제하는 사회 집단의 변화에 맞게 법이나 규정이 적절히 변화하지 못하는 것도 불필요한 규정이 생기는 이유가 되지만, 이 종주를 통해 나는 이러한 불필요한 규정들이 생기는 이유는 다른 것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로 묶으려는, 마치 앨더스 헉슬리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발상 때문이라는 의견을 갖게 되었다. 이 종주를 계획한 선생님들에게는 어떠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KSA 학생이라는 집단을 담당해 인솔한 교관들에게 있어서 KSA 06학번이라는 집단은 각기 판이한 144명으로 이루어진 무리가 아닌 하나의 덩어리였다고 볼 수 있다. 덩어리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당연히 동시에 움직여야 했으며, 그들의 목소리보다 144배 더 큰 함성을 질러야 했고, 뒤처지거나 다치는 사람 하나 없이 한꺼번에 무사해야 했다. 이 때문에 KSA 학생들은 설령 나와 같이 여기저기에 타박상과 찰과상을 입은 채 겨우 쓰러지지 않을 정도의 호흡만 가능한 상태에서 헐떡인다 할지라도 계속 교관의 말마따나 빨리빨리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또한, 그 때문에 가장 앞에 서 있던 환자 대열은 큰 목소리로 음역도 맞지 않는 군가를 따라 불러야 했고, 산이 산이 아닌 발목을 잡아당기는 무언가로 느껴지는데도 좋다를 외쳐야 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군사 독재를 통해,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러한 전체주의적 관념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그 발원지가 되는 독일이나 일본과 같은 나라들보다도 대한민???에는 심각한 군국주의 및 파시즘의 유산이 깃들어 있다. 국기에 대한 경례가 너무나 당연한 의식으로 여겨지고 국가나 교가를 모르는 학생은 뭔가 모자라거나 이상한 학생으로 취급받는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불필요하고 형식적인 규정에서 벗어나려 하는 이들이 설 곳은 없다. 이미 그러한 파시즘을 충분히 경험했으며 그것이 불필요하다는 것도 충분히 경험하기는 했지만, 대한민국에 적을 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파시즘은 습관적인 타성과도 같아 그냥 두기에도 문제이지만 폐할 수도 없는 사안이다.

 

 이 때문에, 더러는 현실 논리를 들어서, 더러는 효율성을 들어서, 이러한 파시즘적인 상황들은 종종 정당화되기까지 한다. 그러한 상황이 괴롭다는 것은 누구나 알 만하며,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바이지만, 파시즘에 지나치게 오래 노출되어 있던 한국인들에게 파시즘은 의식의 일부를 점해 버리는 것이다. 이는 군대에 갔다 온 남성들의 성격이 거칠어지며 막무가내로 변한다는 이야기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어떠한 사고 방식에 지나치게 오래 노출될 경우 인간은 그 사고 방식의 모순이나 맹점을 절대 인지하지 않으며 인지하려고 하지도 않고, 그 사고 방식은 그 인간을 이루는 요소가 되고 만다. 따라서, 어떠한 체제의 모순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 체제의 오랜 구성원들 자신은 체제를 스스로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많은 사회학자들이 주장했던 사회의 내재적 발전이 극히 느린 속도로 이루어지는 것도 이러한 이들 중 체제가 갖는 모순을 지각하는 예외가 극히 적은 숫자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같은 반 학생들과 함께 땅바닥에 모여 앉아 학생들이 교관에 대해 반복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느낀 것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교관을 욕하면서 순간순간 쌓인 분노를 풀 수는 있었지만, 결국 그 학생들에게 있어서 교관이라는 존재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고, 내가 맨 앞에서 절뚝거리며 걸어가서 시간을 끌어 주는 것 외에 그들이 불러 일으키는 문제를 해소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학생들의 건강 상태로나 무엇으로나 그토록 빠른 속도로 산을 오르는 것은 부당하고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는데도 그 점을 지적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고, 도대체 주머니에 손을 넣을 수 없으며 휴대 전화를 사용할 수 없는지 묻는 학생도 없었다. 물론 공포라는 심리가 작용하기도 했겠지만, 이는 일단 규칙이라면 의문 없이 받아들이는 파시즘적인 습성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미 길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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