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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왕립우주군을 상상마당에서 10월 27일 토요일 오후 13시 20분에 보고 왔습니다. 2. 관객은 두 명이었습니다ㅡㅡ; 3. 다른 한 분 표정이 너무 놀란 듯했습니다. 4. ....여고생 오덕이 그렇게 흔찮은겝니까; 5. 이 분이 누구인지 아시는 분은 연락주십시오(...) 궁금해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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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삶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그 글을 쓰는 사람이 정치나 경제적으로 어디에 위치해 있건 간에 소외라는 개념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 기본적인 원인을 사회의 하부 구조에 두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건 구시대의 가치에 대한 향수로써 현실을 개탄하는 도덕주의적 우파가 되었건 현대인이 이 사회 속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관념을 부인하는 한 그들의 의견은 담론을 이루지 못한다. 지나치게 급진적인 화제로 여겨지는 노동과는 대조적으로, 정치적으로 여겨지지 않는 소외의 관념은 주류 담론, 그 중에서도 특히 보수적인 ‘요즘 아이들은’ 식의 푸념을 형성하고 있다. 그렇기에, 현대인의 소외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는 별다른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꺼내 놓고 보면 지나치게 진부하고 고리타분하게 들린다. 어쨌건 간에 지난 한 세기는 현대인들에게 엄청난 정치적 진보를 가져다 주지 않았던가? 자주 따라오는 과거에 대한 발작적 동경이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역사상에 퇴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지나친 일반화이겠지만, 인간의 역사가 모든 면에서 퇴보했고,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에게 소외라는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역시 근거 없는 일반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과학적으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소외 그 자체가 아닌 그런 소외를 가져오는 구체적인 원인이다. 소외라는 표현 자체가 추상적이고 부정확하기 때문에 학술적 용어로 적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구조적으로 과거에 비해 현저히 복잡해진 이 사회에서 어떤 현상에 대한 단편적인 연구는 현상에 대한 이해에 방해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도덕적 타락에 대해 개탄하면서 수많은 구시대적 제도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서 알 수 있듯이, 어떤 현상 자체에 대한 개탄은 무조건적인 부정으로 이어지고, 무조건적인 부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진보 자체에 대한 반동뿐이다. 이 때문에 모든 연구는 현상 자체뿐만 아니라 그 현상을 만들어 낸 원인에 대한 것이 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부정적으로 여기는 현상들에 대한 연구일수록 이런 점은 중요한데, 원인을 생각하지 않은 채 결과만을 비판할 경우 그런 비판은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고 할 법한 원칙은 현대인의 소외를 다루는 데에는 적용되고 있지 않다. 마치 현대의 주류 역사가들에게 유대인 학살이 그렇게 여겨지듯이, 현대인의 소외라는 관념은 그 어떤 반론의 여지도 제공하지 않는 성역이 된 지 오래이다. 온갖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있는 사회과학 서적들이 그리고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이 있기에 우리는 날마다 현대인이 얼마나 과거에 비해 고독한 삶을 살고 있으며, 얼마나 사회에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는지 역시 깨닫게 된다. 그것이 대중을 위한 매체이건 소수를 위한 매체이건 상관없이, 수많은 매체들이 늘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를 전한다. 때로는 근대나 현대의 상징인 합리성에 대한 부질없는 비난과 함께, 때로는 수많은 전통적 가치들에 대한 향수와 함께, 그러나 절대 이 사회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는 없이 그 매체들은 계속해서 현대인의 고통을 한탄한다. 이 점은 소외 그 자체가 현대인의 사회 생활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 중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예술이나 종교를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인 배경을 무시하고 연구할 수 없듯이, 현대인의 심리나 정서 역시 현대 사회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사회 구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현대인의 소외라는 주제에 대한 많은 매체들의 선정적인 태도는 학문적인 탐구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언론이나 대중 문화와 같은 소위 대중 매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닌, 현대 문화를 연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 역시 채택하는 것이기도 하며, 이런 논의는 일반 대중들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 분야에서도 충분히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것이 그런 선정적인 연구가 학문적으로 가치를 갖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감안할 때, 소외 그 자체만큼이나, 소외에 대한 접근 방식도 사회과학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현대인의 소외라는 개념 자체를 생각하기보다는, 그 개념이 여러 매체와 여론에 의해서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유대 인 학살에 대한 선정적인 소설들이 이스라엘과 미국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데에 기여했듯이, 현대인의 소외라는 개념 역시 단순한 사회과학적 현상이 아닌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특히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현재 진행형의 현상일수록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고,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소재가 된다는 점에서 이런 현상은 더더욱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쉬운 범주에 속한다. 비록 모든 학문 혹은 예술에 대해서 기본적으로는 정치적 중립성을 가정하지만, 이런 정치적 중립성의 원칙은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항상 대부분의 경우에 무시되어 왔으며, 특히 비록 대중의 수준이 이전에 비해 크게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중 매체의 발달로 여론 조작이 이전에 비해 간단해진 현대에 와서 이런 연구와 그 결과에 의한 여론 조작은 더더욱 흔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현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이 그러하듯이, 그 비판에 대한 무조건적인 의심 역시 음모론으로 전락할 여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가 음모론이기도 하다. 단순한 친목을 위한 비밀 결사에 불과하던 프리메이슨에 대해 제기된 수많은 음모론이 그렇듯이 이러한 음모론은 황색 언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의, 사회의 변혁이나 진보를 위한 모든 활동에 대한 회의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여론 조작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소외라는 주제에 관한 연구가 연구의 주체들에게 가져다 주는 이익에 대해서는 음모론 없이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점은 냉전 시대의, 그리고 특히 한국이나 미국과 같은 국가들에서 지배층의 이익과 직결된다. 분단 이후 냉전이 끝나고 나서도 냉전 시대의 사고 방식이 어느 정도 유지되었기 때문에, 노동 등의 개념은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또는 이단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 경제 생활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는데도 경제 문제에 대한 담론은 항상 신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만 이끌려 가고 있으며, ‘일하는 사람’은 경제 구조의 부속품으로만 여겨지고 있다. 이 점은 진보를 표방했던 현 정권이 오히려 미국의 네오콘과 같이 자유 방임적인 경제 정책을 채택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합법적으로 여겨질 단기간의 파업조차 국민들의 비난을 살 정도로, 노동을 통한 생산이라는 경제 활동의 주체였던 노동자는 경제 구조의 한 부속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와 같이, 현대 한국의 주류 사회에서 노동이라는 화두는 가장 꺼려지고 기피되는 대상들 중 하나이다. 재벌과 결탁한 군사 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국민들의 의식 자체가 노동이라는 화두를 기피하도록 조종되었다는 이유도 들 수 있겠지만, 그것만큼이나 여전히 변하지 않는 학계나 언론사 등지의 성향을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경우에 고정된 수입이 보장되어 있어 그만큼 사회와 유리되기 쉬운 현대의 학계는 사회 변화를 촉진하던 과거의 학계와 달리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부터 묶어 놓은 코끼리가 다 자란 다음에도 묶어 놓을 수 있듯이, 독재 정권에 의해 ‘길들여진’ 학계에서 참신한 담론이 나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역사학이나 경제학과 같은 사회 과학의 여러 분야를 공부하면서 한 인간의 경제 활동이 그사람의 삶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을 알고 있는 학자들조차, 군사 정권 시대와 마찬가지로 노동이라는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 진보적이라기보다는 극우적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소위 운동권에서나 이런 문제가 가끔 다루어질 뿐이고, 그들조차 경제 활동을 하는 인간을 주체로 보기보다는 상당히 교조주의적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사회적 장치로 보는 경향이 크다. 비약적인 추론일지도 모르겠지만, 바로 이런 노동을 언급하는 것에 대한 기피증이 현대인의 소외만을 강조하는 관행의 단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대중 문화를 비판하는 보수주의적 평론가들이 그러하듯이, 똑같은 현상에 대한 해석이라 할지라도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를 배제하고 개인의 도덕관으로 돌릴 경우 발전적인 해석은 불가능해지게 된다. 기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사회 통념을 바탕으로 하는 관념인 도덕의 한계점으로 인해, 도덕은 사회의 변화에 그만큼 빨리 따라가지 못해 항상 보수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파시즘의 냄새를 풍기는 ‘공동체 의식의 상실’을 현대인이 느끼는 소외의 원인으로 드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진정한 원인에 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가부장적 파시즘이 설득력있는 담론이었던 과거에 비해 현대 사회가 얼마나 크게 변해 왔는가를 지각하지 못한 데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러나 학계가 현실 감각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보다는, 그런 현실 감각 부족이 노동에 대한 외면과 함께 어떤 결과를 초래하느냐이다. 어떤 사회 현상에 대한 대처 방법은 그 현상을 어떻게 보느냐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이 점에서, 노동과 같은 사회적인 문제를 무시하고 개인의 도덕관이라는 보수적인 관념으로 현대인의 소외 문제를 보는 많은 평론가들의 시점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단지 과거로의 회귀를 추구할 뿐이다. 현대인의 삶에는 다른 모든 시대의 삶과 마찬가지로 많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은 현대인이 과거로 회귀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인은 현대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대인의 소외보다 현대의 사회과학이 먼저 생각해야 할 문제는 학자들에 의한 노동의 소외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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