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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의 한 주는 짧기 그지없었다. 일본 오오사카에는 이미 두 번 가 보았다는 것 때문에, 그리고 몽골이라는 낯선 땅에 발을 딛는다는 것은 굳이 “야만 세계”를 탐험한다는 식의 주민들에 대한 무지한 우월감이 없다고 해도 즐거운 일이기에, 그 한 주 동안 외로웠을지는 몰라도 결코 괴롭다고는 할 수 없었다. 평소 거친 일을 어느 정도 많이 해 보았다고 자부하던 터였기에 몽골에서의 일정을 처음 보았을 때 전혀 당황하지 않았던 나이지만, 정작 그 간단하고 거칠다고만 생각했던 일들을 해야 했을 때 다시 아파 오는 허리에 괴로워하며, 충분히 할 수 있을 듯했던 모든 일들이 계속될 때 얼마나 힘든지 깨닫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신문이나 방송과 같은 기관에서는 현재의 직업난이 힘들고 단순한 일을 피하려는 사람들의 경향성 때문이며 그런 “게으름” 때문에 외화가 새어 나가고 있다고 하지만, 3D 업종을 기피하는 빈곤층의 심정을 게으름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비인간적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비록 교훈이나 감동 같은 것을 믿지 않는 나이지만, “편하게” 살아 왔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너무나 큰 불편이 아니겠는가.
그런 힘든 일을 마침내 끝냈을 때, 내가 느낀 것은 그 어떤 보람이나 깨달음보다는 그 정도의 일이 주민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에 대한 걱정이었다. 나와 동료들이 만들었던 흙벽돌이 약하기 그지없다는 것은 그 벽돌을 부수어 진흙을 만들었던 내게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더구나 하루 소득 1달러 미만의 빈곤 상태라는 국가의 학생들을 보면서 그 학생들의 괴력에 가까운 체력과 시력에 경탄하고, 나무 판자를 밟고 올라가서 농구대를 설치하는 끈기에 놀라게 되었을 때, 나는 그들이 과연 한국인의 도움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 것인지, 또는 농업과 목축업을 주로 하기에 “어쨌든 먹고 살 수 있는 나라”에서 대체 소득이란, 그리고 경제 발전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몽골의 사막화 때문에 목축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사막화조차도 풀과 나무를 더 심으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것, 불필요한 산업화를 도입해서 몽골이 지불하게 될 비용보다는 그런 정도의 불편쯤이야 감수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자급자족할 수 없는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작은 나라들에게는 산업화가 절실했다고 해도, 충분히 땅에서 나는 그 모든 것을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몽골과 같은 나라에 굳이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도입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그런 믿음은 마지막 날, 몽골의 도시와 자연을 번갈아 보면서 더 커졌다. 도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교외라고 할 법한 작은 판자촌들은 너무나 흔하게 여겨졌다. 전날 분명히 깊이 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버스 안에서 잘 수 없어 나는 울란바토르의 교외를 별 수 없이 바라보아야 했다. 나름대로 도시답다고 여겼던 시가지에 비해 도시 인구의 대부분이 살고 있다는, 수도도 전기도 없어 초라하기 그지없는 판자촌과 천막촌을 바라보는 심정은 얼마간 착잡했다. 단순히 소련 때문에, 그리고 러시아나 미국 때문에, 초원을 유목하며 평화롭게 살던 몽골인들은 왜 공산주의라는, 그리고 개혁과 개방이라는 굴레에 매인 것일까, 그 두 나라가, 그리고 중국이 몽골에 얼마나 큰 역사적 피해를 주어 왔던 것일까. 한국인들은 일제 강점기 36년이 한국에 끼친 피해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괴로움을 겪어 온 몽골인들도 그러할까. 결국 산업화를 되돌리기는 적극적인 노력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법, 얼마 안 되는, 강이 흐르고 나무가 자라는 지역과 같은 곳마저 결국 산업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을 두려워하며 애덤 스미스와 밀과 케인즈, 혹은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역사나 경제 이론이 얼마나 농경 사회에 “최적화된” 것인지 또 다시 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소감이나 깨달음을 봉사 활동에서 얻어 가고, 그런 깨달음을 한국에 돌아가서까지 “실천하기”를 바라는 것은 학교 당국의 과욕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개성이 강한 학생들이 많다고 학교 당국에서는 주장하지만, 이 학교의 학생들은 다른 어느 학교의 학생들보다도 더 심한 동질 집단이요, 거의 대부분 비슷한 환경의 가정에서 비슷한 교육을 받으며 살아 온 이들이 아니던가? 굳이 자세한 설문 조사 따위를 하지 않아도, 이 점은 학생들의 가정 환경 조사서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빈곤에 허덕이던 학생을, 학원 한 번 다녀 보지 않은 학생을, 혹은 농촌에서 자라난 학생을 찾아보라. 이 학교 학생들 중에서는, 최소한 06학년도 입학생 중에서는, 아무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은 불을 보듯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전혀 가난하지 않은 자신의 가정을 마치 매우 가난했던 듯 묘사한 이 학교의 어떤 졸업생을 비판하지만, 실제 이 학교에서 무산-중산 계급의 중간층에 해당하는 그의 가정은 정말로 가난했던지도 모른다. 그처럼 이 학교의 속성 중 하나인 소시민 혹은 준산 계층 출신이 대다수라는 점은 절대적인 특징이다. 그렇기에 결국 비슷한 계층에서 자라나 비슷한, 그것도 특화된 교육을 받으며, 마치 프랭크 허버트의 SF 소설을 연상시키는 “국가에 공헌해야만 할 인간 컴퓨터”로서 훈련받은 그들에게 국가와 학교는, 그리고 국민은, 어떤 개인적인 차이를 기대해야 할 것인가. 또는, 어떤 개인적인 차이를 기대하려고 하는 것인가. 생물의 속성에 있어 비록 체계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흔히 자유 의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무작위 변수(random factor)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설령 그것이 신경생물학적 실험이라고 하여도 그 변수는 변인의 지극히 일부분만을 차지한다는 것 정도는, 과학을 약간만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개성과 창의성을 길러 준다는 주장이 공허한 것인 만큼, 그들이 여태까지 살아 온 동질적인 삶의 방식만큼이나 이 학교의 구성도 동질적이기 그지없다. 이번 봉사 활동에서 그들이 어떤 것을 얻어 갔는지는 그들의 삶과 관계되는 것일진대, 어차피 어떤 의미로든 모두가 같은 일정을 따라 같은 삶을 살아 왔을 바에야 그들에게 개성과 특수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일까. 기실 이 점은 이 학교에서 좀 더 극명하게 드러날 뿐, 모든 현대인들에게 마찬가지일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합리성과 효율성을 중요시하게 만든 것은 자본주의의 원리이다. 하지만 그런 “돈 놓고 돈 먹기”라는 자본주의의 원리를 부정하는 봉사와 복지에서까지도 합리성과 효율성, 그리고 그 때문에 생겨난 또 다른 근대적인 관념인 “질서”가 강조된다. 사실 그것이 아니라면 봉사 활동을 하기 전에 굳이 체조 따위를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도 규정된 형식의 체조를.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았고, 불필요한 제도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국민은 항상 거의 없다. 이처럼 이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어떤 종류의 자유를 준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 구성원들은 자신이 항상 배워 왔고 자신이 스스로 “택한” 그 질서 내에서 행동한다는 면에서,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 어디에 있든 간에 자신이 속한 사회 내부에서 방목되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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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학생들, 특히 미국 유학이나 특수 목적 고등학교 등을 노리며 미래의 엘리트로서 교육받는 학생들에게 있어서 리더십이란 성적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정성적이며 정량적인 능력의 척도이고, 엘리트 계층에 편입될 수 있을지의 여부를 가르는 잣대이기도 하다. 몇 년 전 한국 각지에 나타난 리더십 훈련소, 그리고 한국에서 각광받고 있는 유학 안내서들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제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반장을 맡으려는 학생들을 말리던 학부모들은 리더십을 증명하는 척도가 된다며 소극적인 학생들에게까지 반장이 되기를 강요하고 있고, 학생 개인의 원활한 학교 생활보다도 리더십을 가름하는 생활 기록부를 위해서 소심한 학생들을 걱정한다. 하지만 과거의 군사 정권 시기에 비해 구조적인 면에서나 일반인들의 의식이라는 면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진 현대 사회에서 권력을 분배하기보다는 스스로 권력을 쥐고자 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보통 역사에 기록되는 이들은 한 사회의 지배층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광기의 시대라고 불리던 20세기 전반이 지나간 지도 이제 60년 가까이 되어 가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시대를 살던 일반인들보다 그 시대를 그런 광기로 몰아 간 지도자들이다. 뛰어난 언변과 어느 정도까지 설득력있는 논리, 여러 가지 집단적 최면 기술을 통해 이러한 지도자들은 자신의 뜻에 따라 한 집단을 좌지우지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물론 현대에는 역사학이 다른 여러 학문과 접목되면서 지도자가 아닌 일반인의 생활에 초점을 두기도 하지만, 여전히 주류 역사학에서는 지도자들의 열전을 역사의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으며, 어떤 역사적 사건을 주도한 지도자들일수록 크게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이것은 한 국가나 집단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그만큼 그 집단 전체의 움직임을 조절할 만한 능력이 있는 이들이었다는 점을 볼 때, 오히려 거시적 역사학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인 사실은 지도자 혹은 독재자로 불리던 이들이 더 이상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문제를 일으키기 어렵게 하는 정치적 장치들이 하나씩 고안되고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 다원화된 사회로 일컬어지는 현대에 오히려 사회의 각 계층에서 현대인의 중요한 자질로 사회성과 지도력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철학과 정치가 태동한 고대에서부터 강조되었던 지극히 고전적인 가치관이며, 비록 도가 사상이나 아나키즘과 같이 지도자나 사회 구조 자체가 내재하는 문제점을 지적한 경우도 있었지만 언제나 이러한 철학은 주류 사회에서 밀려나야 했다. 멀게는 플라톤의 [국가]에서 가깝게는 파시즘과 더 나아가서 신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주류 철학계에서는 한 집단 내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해 왔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여 또한 그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다른 어느 것보다도 현대의 리더십 열풍에서 흥미로운 것은 리더십을 강조하는 이들이 이제 고전 철학 서적을 들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물들은 한 손에 고액권 수표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값비싸고 성능이 우수한 통신 장비를 든 채 설교를 늘어놓는다. 일반적으로 이 사람들은 기술이 발달하고 커뮤니케이션이 다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현대 사회에서는 얼마나 다른 여러 사람과 협력할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결코 [과거와 같이 지식만으로 생존할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 리더십을 강조한다. 현대 사회에 대한 이론이 그 이론의 발원지에서보다도 먼저 퍼져 나가는 한국 사회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미래 사회에 적응한다는 말은 그 어느 명저보다도 더 큰 효력을 갖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리더십의 유무가 돈과 사회적 성공에 직결된다는 이유로, 오히려 유학 가이드보다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등장할 법한 말인 ‘지도자의 자질’은 수많은 학교와 학원의 홍보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말이다. 한국의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명문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입학하여 부와 명예를 걸머쥐기 위해 말없이 수천만, 혹은 수억의 돈을 각종 학원과 과외에 투자한다. 스스로의 ‘경쟁력’이 뒷받침되지 않을 때 지적 능력은 별다른 효용성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그런 홍보지들을 통해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사회에 국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한국 사회처럼 ‘리더십 훈련 학원’이 존재할 정도는 아니라 해도, 대부분의 어느 정도 신자유주의화된 사회에서 이미 리더십은 미래에 돈과 명예를 원하는 이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질로 자리잡았다. 현대 사회에서 협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파하면서, 모든 자기 소개서에는 공동체 활동에 얼마나 활발하게 참가했으며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지 쓰는 것이 보편화되어 가고 있다.
특히 미국과 같은 사회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리더십이 기존의 특권층에 속하는 것과 종종 중복된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학창 시절에 사회적인 활동을 많이 했느냐와 무관하게 종종 명문 학교의 학생들은 일반 학교와 ‘달동네 학교’의 학생들에 비해 리더십 평가 면에서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한다. 빈민가의 고등학교에서 높은 성적을 얻은 인물이라 해도 빈민가의 고등학교를 졸업해 ‘리더십이 없다’는 이유로 명문 고등학교를 평범한 성적으로 졸업하는 학생보다 미국 대학 입학에 불리하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다. 리더십이라는 용어의 불분명한 기준에 힘입어 이러한 조건은 사회에서 이미 사회적 성공을 지닌 이들을 특별히 걸러 내는 데에 종종 활용된다.
즉, 현대의 리더십 열풍은 단순히 고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많은 사상이 스쳐 지나가는 과정에서 지도자를 언급한 것과는 그 비중이 같다고 할 수 없다. 철학이나 역사학과 같은 인문학이 자연 과학이나 공학에 비해 퇴조를 보이는 시점에서, 그 어떤 사상적 전통보다도 리더십 열풍을 부추기는 것은 돈과 명예에 대한 기정사실화된 약속이며, 현대 사회일수록 다른 어떤 사회에 비해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는 광고지를 쥔 연설가들의 흡인력 있는 목소리이다. 이에 비해, 리더십 열풍은 한국의 인문학계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진 적이 거의 없는 분야이다. 이 때문에 이 글에서는 리더십 열풍이 역사적으로 갖는 위치를 다루고 리더십 열풍의 원인을 분석하며, 현대 사회의 가치와 얼마나 일치하며, 이런 리더십이 한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 실제보다 더 각광받고 있는지 기술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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