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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질'에 해당하는 글(3)
2007/08/07   REIDEEN ED - 駆け足の生き様
2007/06/27   윤리과제를 빙자한 바보같은 글
2007/06/09   몽골 관제기행문 (4)


REIDEEN ED - 駆け足の生き様
生きている意味はなんなのか 初めて悩んだ
살아 있는 의미는 무엇인지 처음으로 고민했다
そんな事も判らない未熟な自分を
그런 것도 판단하지 못하는 미숙한 자신을
 ぶち壊したかった反抗期
쳐부수고팠던 반항기
自分以外はみんな敵 たやすく触れると
자신 이외엔 모두 적, 손쉽게 스치면
見た事ない傷口が
본 적 없는 상처가
心の何処かに広がっていくのを感じてた
마음 어딘가에서 벌어져 가는 걸 느꼈어

危ないゲームに上手くしがみついて
위험한 놀이에 솜씨좋게 매달려
 残った奴が生きていられた思春期
남는 자가 살아갈 수 있던 사춘기
名を揚げる為に 煙草をふかして
이름을 떨치기 위해 담배를 피우고
 次の生き方を企んでた
다음으로 살아갈 길을 꾸몄다

駆け足の生き様
달려가는 삶
愛する為に生まれた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
駆け足の生き様
달려가는 삶
 いつかあたしの願い 天まで届け
언젠가 내 소원이 하늘까지 닿기를

初めて恋を失った 死んでもよかった
처음으로 사랑을 잃었어, 죽어도 좋았다
だけどそれから何度でも死にたくなるのを
하지만 그 다음에 몇 번이나 죽고 싶다는 걸
覚えてしまった青年期
떠올려 버렸던 청년기

真面目になるのは損する事だと
진지해지는 건 손해보는 것이라고
胸の教科書は 誰かに書きなぐられて
가슴 속 교과서엔 누군가 써 두었어
だから世の中のルールを無視して
그래서 세상의 규칙을 무시하고
生きていく事を考えてた
살아가는 걸 생각했다

駆け足の生き様
달려가는 삶
愛されたくて生きてた
사랑받고 싶어서 살아갔다
駆け足の生き様
달려가는 삶
 いつかあたしの想い 天を貫け
언젠가 내 마음이 하늘을 꿰뚫기를

思い出せるのは いつも泣かされて
기억할 수 있는 건 언제나 울게 되어서
逃げてばかりの臆病者の背中
도망치기만 했던 겁 먹은 등
今も変わらない心を抱えて
지금도 변하지 않는 마음을 끌어안고
昨日も明日も走っている
매일매일 달리고 있어

駆け足の生き様
달려가는 삶
愛する為に生まれた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
駆け足の生き様
달려가는 삶
 いつかあたしの願い 天まで届け
언젠가 내 소원이 하늘까지 닿기를
----------------------------------------------------------------------------------------
그다지 좋은 번역 같지는 않지만, 요즘 이 노래가 마음에 들어서 정신없이 듣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 곡이든 가사든 지극히 평범한 노래지만, 신작 아니메(래봤자 완결난 것들도 있다) 주제곡들 중에선 endscape과 駆け足の生き様 외에 마음에 드는 노래가 없다.

그냥, 좀 높은 남성 보컬의 질러대는 노래가 끌린다는 것 정도일까 ㅡㅡ
Tag : 삽질


윤리과제를 빙자한 바보같은 글
 현대인의 삶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그 글을 쓰는 사람이 정치나 경제적으로 어디에 위치해 있건 간에 소외라는 개념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 기본적인 원인을 사회의 하부 구조에 두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건 구시대의 가치에 대한 향수로써 현실을 개탄하는 도덕주의적 우파가 되었건 현대인이 이 사회 속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관념을 부인하는 한 그들의 의견은 담론을 이루지 못한다. 지나치게 급진적인 화제로 여겨지는 노동과는 대조적으로, 정치적으로 여겨지지 않는 소외의 관념은 주류 담론, 그 중에서도 특히 보수적인 ‘요즘 아이들은’ 식의 푸념을 형성하고 있다. 그렇기에, 현대인의 소외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는 별다른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꺼내 놓고 보면 지나치게 진부하고 고리타분하게 들린다. 어쨌건 간에 지난 한 세기는 현대인들에게 엄청난 정치적 진보를 가져다 주지 않았던가? 자주 따라오는 과거에 대한 발작적 동경이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역사상에 퇴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지나친 일반화이겠지만, 인간의 역사가 모든 면에서 퇴보했고,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에게 소외라는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역시 근거 없는 일반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과학적으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소외 그 자체가 아닌 그런 소외를 가져오는 구체적인 원인이다. 소외라는 표현 자체가 추상적이고 부정확하기 때문에 학술적 용어로 적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구조적으로 과거에 비해 현저히 복잡해진 이 사회에서 어떤 현상에 대한 단편적인 연구는 현상에 대한 이해에 방해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도덕적 타락에 대해 개탄하면서 수많은 구시대적 제도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서 알 수 있듯이, 어떤 현상 자체에 대한 개탄은 무조건적인 부정으로 이어지고, 무조건적인 부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진보 자체에 대한 반동뿐이다. 이 때문에 모든 연구는 현상 자체뿐만 아니라 그 현상을 만들어 낸 원인에 대한 것이 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부정적으로 여기는 현상들에 대한 연구일수록 이런 점은 중요한데, 원인을 생각하지 않은 채 결과만을 비판할 경우 그런 비판은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고 할 법한 원칙은 현대인의 소외를 다루는 데에는 적용되고 있지 않다. 마치 현대의 주류 역사가들에게 유대인 학살이 그렇게 여겨지듯이, 현대인의 소외라는 관념은 그 어떤 반론의 여지도 제공하지 않는 성역이 된 지 오래이다. 온갖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있는 사회과학 서적들이 그리고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이 있기에 우리는 날마다 현대인이 얼마나 과거에 비해 고독한 삶을 살고 있으며, 얼마나 사회에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는지 역시 깨닫게 된다. 그것이 대중을 위한 매체이건 소수를 위한 매체이건 상관없이, 수많은 매체들이 늘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를 전한다. 때로는 근대나 현대의 상징인 합리성에 대한 부질없는 비난과 함께, 때로는 수많은 전통적 가치들에 대한 향수와 함께, 그러나 절대 이 사회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는 없이 그 매체들은 계속해서 현대인의 고통을 한탄한다.
 이 점은 소외 그 자체가 현대인의 사회 생활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 중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예술이나 종교를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인 배경을 무시하고 연구할 수 없듯이, 현대인의 심리나 정서 역시 현대 사회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사회 구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현대인의 소외라는 주제에 대한 많은 매체들의 선정적인 태도는 학문적인 탐구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언론이나 대중 문화와 같은 소위 대중 매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닌, 현대 문화를 연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 역시 채택하는 것이기도 하며, 이런 논의는 일반 대중들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 분야에서도 충분히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것이 그런 선정적인 연구가 학문적으로 가치를 갖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감안할 때, 소외 그 자체만큼이나, 소외에 대한 접근 방식도 사회과학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현대인의 소외라는 개념 자체를 생각하기보다는, 그 개념이 여러 매체와 여론에 의해서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유대 인 학살에 대한 선정적인 소설들이 이스라엘과 미국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데에 기여했듯이, 현대인의 소외라는 개념 역시 단순한 사회과학적 현상이 아닌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특히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현재 진행형의 현상일수록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고,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소재가 된다는 점에서 이런 현상은 더더욱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쉬운 범주에 속한다. 비록 모든 학문 혹은 예술에 대해서 기본적으로는 정치적 중립성을 가정하지만, 이런 정치적 중립성의 원칙은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항상 대부분의 경우에 무시되어 왔으며, 특히 비록 대중의 수준이 이전에 비해 크게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중 매체의 발달로 여론 조작이 이전에 비해 간단해진 현대에 와서 이런 연구와 그 결과에 의한 여론 조작은 더더욱 흔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현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이 그러하듯이, 그 비판에 대한 무조건적인 의심 역시 음모론으로 전락할 여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가 음모론이기도 하다. 단순한 친목을 위한 비밀 결사에 불과하던 프리메이슨에 대해 제기된 수많은 음모론이 그렇듯이 이러한 음모론은 황색 언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의, 사회의 변혁이나 진보를 위한 모든 활동에 대한 회의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여론 조작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소외라는 주제에 관한 연구가 연구의 주체들에게 가져다 주는 이익에 대해서는 음모론 없이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점은 냉전 시대의, 그리고 특히 한국이나 미국과 같은 국가들에서 지배층의 이익과 직결된다. 분단 이후 냉전이 끝나고 나서도 냉전 시대의 사고 방식이 어느 정도 유지되었기 때문에, 노동 등의 개념은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또는 이단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 경제 생활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는데도 경제 문제에 대한 담론은 항상 신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만 이끌려 가고 있으며, ‘일하는 사람’은 경제 구조의 부속품으로만 여겨지고 있다. 이 점은 진보를 표방했던 현 정권이 오히려 미국의 네오콘과 같이 자유 방임적인 경제 정책을 채택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합법적으로 여겨질 단기간의 파업조차 국민들의 비난을 살 정도로, 노동을 통한 생산이라는 경제 활동의 주체였던 노동자는 경제 구조의 한 부속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와 같이, 현대 한국의 주류 사회에서 노동이라는 화두는 가장 꺼려지고 기피되는 대상들 중 하나이다. 재벌과 결탁한 군사 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국민들의 의식 자체가 노동이라는 화두를 기피하도록 조종되었다는 이유도 들 수 있겠지만, 그것만큼이나 여전히 변하지 않는 학계나 언론사 등지의 성향을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경우에 고정된 수입이 보장되어 있어 그만큼 사회와 유리되기 쉬운 현대의 학계는 사회 변화를 촉진하던 과거의 학계와 달리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부터 묶어 놓은 코끼리가 다 자란 다음에도 묶어 놓을 수 있듯이, 독재 정권에 의해 ‘길들여진’ 학계에서 참신한 담론이 나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역사학이나 경제학과 같은 사회 과학의 여러 분야를 공부하면서 한 인간의 경제 활동이 그사람의 삶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을 알고 있는 학자들조차, 군사 정권 시대와 마찬가지로 노동이라는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 진보적이라기보다는 극우적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소위 운동권에서나 이런 문제가 가끔 다루어질 뿐이고, 그들조차 경제 활동을 하는 인간을 주체로 보기보다는 상당히 교조주의적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사회적 장치로 보는 경향이 크다.
 비약적인 추론일지도 모르겠지만, 바로 이런 노동을 언급하는 것에 대한 기피증이 현대인의 소외만을 강조하는 관행의 단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대중 문화를 비판하는 보수주의적 평론가들이 그러하듯이, 똑같은 현상에 대한 해석이라 할지라도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를 배제하고 개인의 도덕관으로 돌릴 경우 발전적인 해석은 불가능해지게 된다. 기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사회 통념을 바탕으로 하는 관념인 도덕의 한계점으로 인해, 도덕은 사회의 변화에 그만큼 빨리 따라가지 못해 항상 보수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파시즘의 냄새를 풍기는 ‘공동체 의식의 상실’을 현대인이 느끼는 소외의 원인으로 드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진정한 원인에 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가부장적 파시즘이 설득력있는 담론이었던 과거에 비해 현대 사회가 얼마나 크게 변해 왔는가를 지각하지 못한 데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러나 학계가 현실 감각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보다는, 그런 현실 감각 부족이 노동에 대한 외면과 함께 어떤 결과를 초래하느냐이다. 어떤 사회 현상에 대한 대처 방법은 그 현상을 어떻게 보느냐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이 점에서, 노동과 같은 사회적인 문제를 무시하고 개인의 도덕관이라는 보수적인 관념으로 현대인의 소외 문제를 보는 많은 평론가들의 시점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단지 과거로의 회귀를 추구할 뿐이다.
 현대인의 삶에는 다른 모든 시대의 삶과 마찬가지로 많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은 현대인이 과거로 회귀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인은 현대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대인의 소외보다 현대의 사회과학이 먼저 생각해야 할 문제는 학자들에 의한 노동의 소외가 아닐까?
Tag : 삽질


몽골 관제기행문
  몽골에서의 한 주는 짧기 그지없었다. 일본 오오사카에는 이미 두 번 가 보았다는 것 때문에, 그리고 몽골이라는 낯선 땅에 발을 딛는다는 것은 굳이 “야만 세계”를 탐험한다는 식의 주민들에 대한 무지한 우월감이 없다고 해도 즐거운 일이기에, 그 한 주 동안 외로웠을지는 몰라도 결코 괴롭다고는 할 수 없었다. 평소 거친 일을 어느 정도 많이 해 보았다고 자부하던 터였기에 몽골에서의 일정을 처음 보았을 때 전혀 당황하지 않았던 나이지만, 정작 그 간단하고 거칠다고만 생각했던 일들을 해야 했을 때 다시 아파 오는 허리에 괴로워하며, 충분히 할 수 있을 듯했던 모든 일들이 계속될 때 얼마나 힘든지 깨닫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신문이나 방송과 같은 기관에서는 현재의 직업난이 힘들고 단순한 일을 피하려는 사람들의 경향성 때문이며 그런 “게으름” 때문에 외화가 새어 나가고 있다고 하지만, 3D 업종을 기피하는 빈곤층의 심정을 게으름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비인간적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비록 교훈이나 감동 같은 것을 믿지 않는 나이지만, “편하게” 살아 왔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너무나 큰 불편이 아니겠는가.

  그런 힘든 일을 마침내 끝냈을 때, 내가 느낀 것은 그 어떤 보람이나 깨달음보다는 그 정도의 일이 주민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에 대한 걱정이었다. 나와 동료들이 만들었던 흙벽돌이 약하기 그지없다는 것은 그 벽돌을 부수어 진흙을 만들었던 내게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더구나 하루 소득 1달러 미만의 빈곤 상태라는 국가의 학생들을 보면서 그 학생들의 괴력에 가까운 체력과 시력에 경탄하고, 나무 판자를 밟고 올라가서 농구대를 설치하는 끈기에 놀라게 되었을 때, 나는 그들이 과연 한국인의 도움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 것인지, 또는 농업과 목축업을 주로 하기에 “어쨌든 먹고 살 수 있는 나라”에서 대체 소득이란, 그리고 경제 발전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몽골의 사막화 때문에 목축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사막화조차도 풀과 나무를 더 심으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것, 불필요한 산업화를 도입해서 몽골이 지불하게 될 비용보다는 그런 정도의 불편쯤이야 감수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자급자족할 수 없는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작은 나라들에게는 산업화가 절실했다고 해도, 충분히 땅에서 나는 그 모든 것을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몽골과 같은 나라에 굳이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도입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그런 믿음은 마지막 날, 몽골의 도시와 자연을 번갈아 보면서 더 커졌다. 도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교외라고 할 법한 작은 판자촌들은 너무나 흔하게 여겨졌다. 전날 분명히 깊이 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버스 안에서 잘 수 없어 나는 울란바토르의 교외를 별 수 없이 바라보아야 했다. 나름대로 도시답다고 여겼던 시가지에 비해 도시 인구의 대부분이 살고 있다는, 수도도 전기도 없어 초라하기 그지없는 판자촌과 천막촌을 바라보는 심정은 얼마간 착잡했다. 단순히 소련 때문에, 그리고 러시아나 미국 때문에, 초원을 유목하며 평화롭게 살던 몽골인들은 왜 공산주의라는, 그리고 개혁과 개방이라는 굴레에 매인 것일까, 그 두 나라가, 그리고 중국이 몽골에 얼마나 큰 역사적 피해를 주어 왔던 것일까. 한국인들은 일제 강점기 36년이 한국에 끼친 피해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괴로움을 겪어 온 몽골인들도 그러할까. 결국 산업화를 되돌리기는 적극적인 노력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법, 얼마 안 되는, 강이 흐르고 나무가 자라는 지역과 같은 곳마저 결국 산업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을 두려워하며 애덤 스미스와 밀과 케인즈, 혹은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역사나 경제 이론이 얼마나 농경 사회에 “최적화된” 것인지 또 다시 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소감이나 깨달음을 봉사 활동에서 얻어 가고, 그런 깨달음을 한국에 돌아가서까지 “실천하기”를 바라는 것은 학교 당국의 과욕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개성이 강한 학생들이 많다고 학교 당국에서는 주장하지만, 이 학교의 학생들은 다른 어느 학교의 학생들보다도 더 심한 동질 집단이요, 거의 대부분 비슷한 환경의 가정에서 비슷한 교육을 받으며 살아 온 이들이 아니던가? 굳이 자세한 설문 조사 따위를 하지 않아도, 이 점은 학생들의 가정 환경 조사서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빈곤에 허덕이던 학생을, 학원 한 번 다녀 보지 않은 학생을, 혹은 농촌에서 자라난 학생을 찾아보라. 이 학교 학생들 중에서는, 최소한 06학년도 입학생 중에서는, 아무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은 불을 보듯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전혀 가난하지 않은 자신의 가정을 마치 매우 가난했던 듯 묘사한 이 학교의 어떤 졸업생을 비판하지만, 실제 이 학교에서 무산-중산 계급의 중간층에 해당하는 그의 가정은 정말로 가난했던지도 모른다. 그처럼 이 학교의 속성 중 하나인 소시민 혹은 준산 계층 출신이 대다수라는 점은 절대적인 특징이다. 그렇기에 결국 비슷한 계층에서 자라나 비슷한, 그것도 특화된 교육을 받으며, 마치 프랭크 허버트의 SF 소설을 연상시키는 “국가에 공헌해야만 할 인간 컴퓨터”로서 훈련받은 그들에게 국가와 학교는, 그리고 국민은, 어떤 개인적인 차이를 기대해야 할 것인가. 또는, 어떤 개인적인 차이를 기대하려고 하는 것인가. 생물의 속성에 있어 비록 체계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흔히 자유 의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무작위 변수(random factor)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설령 그것이 신경생물학적 실험이라고 하여도 그 변수는 변인의 지극히 일부분만을 차지한다는 것 정도는, 과학을 약간만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개성과 창의성을 길러 준다는 주장이 공허한 것인 만큼, 그들이 여태까지 살아 온 동질적인 삶의 방식만큼이나 이 학교의 구성도 동질적이기 그지없다. 이번 봉사 활동에서 그들이 어떤 것을 얻어 갔는지는 그들의 삶과 관계되는 것일진대, 어차피 어떤 의미로든 모두가 같은 일정을 따라 같은 삶을 살아 왔을 바에야 그들에게 개성과 특수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일까. 기실 이 점은 이 학교에서 좀 더 극명하게 드러날 뿐, 모든 현대인들에게 마찬가지일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합리성과 효율성을 중요시하게 만든 것은 자본주의의 원리이다. 하지만 그런 “돈 놓고 돈 먹기”라는 자본주의의 원리를 부정하는 봉사와 복지에서까지도 합리성과 효율성, 그리고 그 때문에 생겨난 또 다른 근대적인 관념인 “질서”가 강조된다. 사실 그것이 아니라면 봉사 활동을 하기 전에 굳이 체조 따위를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도 규정된 형식의 체조를.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았고, 불필요한 제도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국민은 항상 거의 없다. 이처럼 이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어떤 종류의 자유를 준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 구성원들은 자신이 항상 배워 왔고 자신이 스스로 “택한” 그 질서 내에서 행동한다는 면에서,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 어디에 있든 간에 자신이 속한 사회 내부에서 방목되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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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 UQW, 공부, 삽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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