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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limited Quotation Works 캐스팅 전문 ㅡ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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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am the bone of my readings. Notes are my body, and ink is my blood. I have copied over a thousand books. Unaware of the theme, Nor aware of the subject. Withstood pain to create library. Waiting for one's argument. I have no regrets. This is the only path. My whole life was "unlimited quotation works."
- 몸은 책으로 되어 있다. 피는 잉크이며 마음은 종이 수많은 서가를 넘어서도 암기 단 한 번도 지치지 않고 단 한 번도 망각하지 못한다 연사는 여기에 혼자 경전의 언덕에서 문장을 낭송한다 따라서, 생애에 의미는 없으니 이 몸은 무한한 인용으로 되어 있다.
ー体は書に出てきてた 血潮はインクで心は紙 幾たびの書袈を越えて暗記 ただ一度の疲労はなく、 ただ一度の忘はなし。 吟ずる声はここに独り 経典の丘で文章を朗誦する ならば、我が生涯に意味は不要ず。 この体は、無限な引用で出来ていた。
* 아처버전 캐스팅 추가했습니다.
- I am the bone of my readings. Notes are my body, and ink is my blood. I have copied over a thousand books. Unknown was the Theme, Nor known was the Subject. Have withstood pain to create large libraries. Yet, those hands will never write anything. So, as I pray, Unlimited Quotation Works.
(일어버전은 별 차이가 없어서 씹었습니다)
......그냥 UQW에 대한 묘사를 듣고 한 번 써 보고 싶었습니다; (...원문에 맞추느라 실제 풍자(?)하려는 인물과 안 맞는 면이 있군요. 원래 아래쪽 건 일본어로 써야 하는데 독본을 잃어버려서 그냥 한국어 번역버전으로 휘갈겨뒀습니다) 예, 원래 제가 오덕하고 찌질합니다. 그러니까 안 까셔도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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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의 한 주는 짧기 그지없었다. 일본 오오사카에는 이미 두 번 가 보았다는 것 때문에, 그리고 몽골이라는 낯선 땅에 발을 딛는다는 것은 굳이 “야만 세계”를 탐험한다는 식의 주민들에 대한 무지한 우월감이 없다고 해도 즐거운 일이기에, 그 한 주 동안 외로웠을지는 몰라도 결코 괴롭다고는 할 수 없었다. 평소 거친 일을 어느 정도 많이 해 보았다고 자부하던 터였기에 몽골에서의 일정을 처음 보았을 때 전혀 당황하지 않았던 나이지만, 정작 그 간단하고 거칠다고만 생각했던 일들을 해야 했을 때 다시 아파 오는 허리에 괴로워하며, 충분히 할 수 있을 듯했던 모든 일들이 계속될 때 얼마나 힘든지 깨닫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신문이나 방송과 같은 기관에서는 현재의 직업난이 힘들고 단순한 일을 피하려는 사람들의 경향성 때문이며 그런 “게으름” 때문에 외화가 새어 나가고 있다고 하지만, 3D 업종을 기피하는 빈곤층의 심정을 게으름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비인간적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비록 교훈이나 감동 같은 것을 믿지 않는 나이지만, “편하게” 살아 왔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너무나 큰 불편이 아니겠는가.
그런 힘든 일을 마침내 끝냈을 때, 내가 느낀 것은 그 어떤 보람이나 깨달음보다는 그 정도의 일이 주민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에 대한 걱정이었다. 나와 동료들이 만들었던 흙벽돌이 약하기 그지없다는 것은 그 벽돌을 부수어 진흙을 만들었던 내게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더구나 하루 소득 1달러 미만의 빈곤 상태라는 국가의 학생들을 보면서 그 학생들의 괴력에 가까운 체력과 시력에 경탄하고, 나무 판자를 밟고 올라가서 농구대를 설치하는 끈기에 놀라게 되었을 때, 나는 그들이 과연 한국인의 도움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 것인지, 또는 농업과 목축업을 주로 하기에 “어쨌든 먹고 살 수 있는 나라”에서 대체 소득이란, 그리고 경제 발전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몽골의 사막화 때문에 목축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사막화조차도 풀과 나무를 더 심으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것, 불필요한 산업화를 도입해서 몽골이 지불하게 될 비용보다는 그런 정도의 불편쯤이야 감수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자급자족할 수 없는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작은 나라들에게는 산업화가 절실했다고 해도, 충분히 땅에서 나는 그 모든 것을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몽골과 같은 나라에 굳이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도입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그런 믿음은 마지막 날, 몽골의 도시와 자연을 번갈아 보면서 더 커졌다. 도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교외라고 할 법한 작은 판자촌들은 너무나 흔하게 여겨졌다. 전날 분명히 깊이 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버스 안에서 잘 수 없어 나는 울란바토르의 교외를 별 수 없이 바라보아야 했다. 나름대로 도시답다고 여겼던 시가지에 비해 도시 인구의 대부분이 살고 있다는, 수도도 전기도 없어 초라하기 그지없는 판자촌과 천막촌을 바라보는 심정은 얼마간 착잡했다. 단순히 소련 때문에, 그리고 러시아나 미국 때문에, 초원을 유목하며 평화롭게 살던 몽골인들은 왜 공산주의라는, 그리고 개혁과 개방이라는 굴레에 매인 것일까, 그 두 나라가, 그리고 중국이 몽골에 얼마나 큰 역사적 피해를 주어 왔던 것일까. 한국인들은 일제 강점기 36년이 한국에 끼친 피해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괴로움을 겪어 온 몽골인들도 그러할까. 결국 산업화를 되돌리기는 적극적인 노력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법, 얼마 안 되는, 강이 흐르고 나무가 자라는 지역과 같은 곳마저 결국 산업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을 두려워하며 애덤 스미스와 밀과 케인즈, 혹은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역사나 경제 이론이 얼마나 농경 사회에 “최적화된” 것인지 또 다시 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소감이나 깨달음을 봉사 활동에서 얻어 가고, 그런 깨달음을 한국에 돌아가서까지 “실천하기”를 바라는 것은 학교 당국의 과욕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개성이 강한 학생들이 많다고 학교 당국에서는 주장하지만, 이 학교의 학생들은 다른 어느 학교의 학생들보다도 더 심한 동질 집단이요, 거의 대부분 비슷한 환경의 가정에서 비슷한 교육을 받으며 살아 온 이들이 아니던가? 굳이 자세한 설문 조사 따위를 하지 않아도, 이 점은 학생들의 가정 환경 조사서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빈곤에 허덕이던 학생을, 학원 한 번 다녀 보지 않은 학생을, 혹은 농촌에서 자라난 학생을 찾아보라. 이 학교 학생들 중에서는, 최소한 06학년도 입학생 중에서는, 아무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은 불을 보듯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전혀 가난하지 않은 자신의 가정을 마치 매우 가난했던 듯 묘사한 이 학교의 어떤 졸업생을 비판하지만, 실제 이 학교에서 무산-중산 계급의 중간층에 해당하는 그의 가정은 정말로 가난했던지도 모른다. 그처럼 이 학교의 속성 중 하나인 소시민 혹은 준산 계층 출신이 대다수라는 점은 절대적인 특징이다. 그렇기에 결국 비슷한 계층에서 자라나 비슷한, 그것도 특화된 교육을 받으며, 마치 프랭크 허버트의 SF 소설을 연상시키는 “국가에 공헌해야만 할 인간 컴퓨터”로서 훈련받은 그들에게 국가와 학교는, 그리고 국민은, 어떤 개인적인 차이를 기대해야 할 것인가. 또는, 어떤 개인적인 차이를 기대하려고 하는 것인가. 생물의 속성에 있어 비록 체계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흔히 자유 의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무작위 변수(random factor)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설령 그것이 신경생물학적 실험이라고 하여도 그 변수는 변인의 지극히 일부분만을 차지한다는 것 정도는, 과학을 약간만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개성과 창의성을 길러 준다는 주장이 공허한 것인 만큼, 그들이 여태까지 살아 온 동질적인 삶의 방식만큼이나 이 학교의 구성도 동질적이기 그지없다. 이번 봉사 활동에서 그들이 어떤 것을 얻어 갔는지는 그들의 삶과 관계되는 것일진대, 어차피 어떤 의미로든 모두가 같은 일정을 따라 같은 삶을 살아 왔을 바에야 그들에게 개성과 특수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일까. 기실 이 점은 이 학교에서 좀 더 극명하게 드러날 뿐, 모든 현대인들에게 마찬가지일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합리성과 효율성을 중요시하게 만든 것은 자본주의의 원리이다. 하지만 그런 “돈 놓고 돈 먹기”라는 자본주의의 원리를 부정하는 봉사와 복지에서까지도 합리성과 효율성, 그리고 그 때문에 생겨난 또 다른 근대적인 관념인 “질서”가 강조된다. 사실 그것이 아니라면 봉사 활동을 하기 전에 굳이 체조 따위를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도 규정된 형식의 체조를.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았고, 불필요한 제도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국민은 항상 거의 없다. 이처럼 이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어떤 종류의 자유를 준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 구성원들은 자신이 항상 배워 왔고 자신이 스스로 “택한” 그 질서 내에서 행동한다는 면에서,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 어디에 있든 간에 자신이 속한 사회 내부에서 방목되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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